총 180페이지

61페이지 본문시작

1466년(세조 12)에 특출한 인재를 뽑는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 각각 2등으로 급제해서 예조판서와 의정
부좌·우참찬에 올랐다. 1471년(성종 2)에 좌리공신(佐理
功臣) 3등에 서하군(西河君)으로 봉해졌으며 1478년(성종
9) 한 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좌찬성(左贊成-종1품)까지 올
랐다. 78세로 졸하였고 뒤에 1506년의 중종반정 후 아들
사홍(士洪)에 연좌되어 관직이 삭탈되고‘대임(大任)’
이라
비난받았다. 경사(經史)에 밝고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풍수(風水)·의약(醫藥)·복서(卜筮)에도 통달했다. 1463
<임원준이 비문을 지은 신정비와 비각>
년에《의약론(醫藥論)》
을 주해(註解)했고 성종 때《경국대
전》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1464년(세조 10)에 세조가 온양온천 행궁에 왔을 때 왕을 호종하고 왔다. 이 때 그가 지은‘온양팔
영(溫陽八詠)’
이 전해진다. 또 당시에 온궁 안에서 맑고 찬 샘물이 솟아나서 이를 기뻐한 세조가 주필신정
비(駐 神井碑)를 세우도록 명하자 그가 비문을 짓고 이숙감(李淑 )이 글씨를 썼다. 지금도 온천동 온양관
광호텔 안에 1476년(성종 7)에 새로 세운 비가 전해지고 있다.
[98] 임준
任晙
<1588(선조 21년) ~ 1668(현종 9년)>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으로 명신(名臣) 내신( 臣)의 증손자, 현감 기(琦)의 손자, 풍
천임씨 아산 입향조(入鄕祖)인 사예 희지(羲之)의 장남이다. 자는 백승(伯升)이고 아산 염치 죽실에서 태
어났으며 서울에서 거주하기도 하였다. 26세 되던 1613년(광해군 5) 증광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절충장군
(折衝將軍-정3품) 부호군(副護軍)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 희지(羲之)의 묘를 쓰기 위해 산으로‘지관을 아
홉 번 업고 올라갔다’
고 전해질 만큼 정성을 다했으며 그 덕에 후손들 중에서 대과(문과) 12자리가 났다는
일화가 있다. 본인은 아산 염치 쌍죽리에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정해 놓았으나 동생 환( )이 먼저 죽어서
그 자리에 묘를 썼다. 묘는 천안 구룡리 아버지의 묘 아래에 있다. 후손 헌회(憲晦)가 좨주로 있을 때 찬한
묘표가 있다.
[99] 임징하
任徵夏
<1687(숙종 13년) ~ 1730(영조 6년)>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아산 염치 쌍죽리 출신이다. 풍천 임씨 아산 입향조(入鄕
祖)인 사예 희지(羲之)의 현손, 지중추부사 홍망(弘望)의 손자, 집의 형(泂)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연
안 이(李)씨로 의저(義著)의 딸이다. 부인은 광산(光山) 김(金)씨로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오빠인 호조판
서 진구(鎭龜)의 딸이다. 문인으로도 유명한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은 그의 처남이다. 그의 자는 성능
(聖能), 호는 서재(西齋)다.
60

61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