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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대에 들어가서 해미지방의 순교사실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 것은 1838년이었다. 즉,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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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8월 20일에는 해미에서 조홍운 안드레아가 순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해미지방에서는 서울에서 기해교난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해부터 박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중앙정부의 동향과는 무관하게 지방관아 단위로 전개된 박해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중앙에서 박해가 발생할 경우에는 지방에까지 그 여파가 미치기
마련이었다.
즉, 1839년에는 기해교난(己 敎難)이 일어났고 그 교난의 여파는 충청도에까지 미쳤다. 이 교
난의 과정에서 충청도 각 지방에서는 많은 신도들이 체포된 후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되었다. 이때
해미진영에서도 천주교 신도들이 체포되어 심문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전 베드로가 순교했다.
그는 원래 면천 양데출신이었다. 그는 몸이 작고 얼굴이 못생기고 병충이고 절름발이요, 머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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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막혀 있어서 누구에게나 멸시를 당하고 놀림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해미진영에
압송된 이후 다른 많은 신도들이 배교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끝까지 신앙을 고수했다. 그러다
가 그는 1839년 9월중에 굶주림과 장독(
)으로 옥사했다. 그의 나이는 30세가 넘었다.
내포지역에서 천주교 관계 사건이 가장 집중적으로 전개된 곳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해
미지방이었다. 그러나 해미는 한 때 내포지방의 8개 군현 중 유일하게 진영이 설치되어 있는 공이
었기 때문에 부근의 군현으로부터 이송 당한 천주교 신도들이 이곳에서 구금되어 있거나 사형을
당했다. 이런 까닭으로 이곳에서는 많은 신도들이 순교를 했던 것이다.
해미지방에 천주교가 전파된 이후인 1779년부터 1839년의 기해교난(己 敎難)에 이르기까지
이곳에서 구금되었거나 처형된 신도들은 다음 <표 1>을 통해서 확인된다.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18명의 신도들 가운데 적어도 12명은 해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거나 타살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감옥에서 굶어 죽거나 장독(
)으로 말미암아 옥사했다.
25) Daveluy, ibid, 359쪽.
26) 달레, 위의 책, , 4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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