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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을 하다 실패하고 야밤도주한 일도 있어서 좀처럼 온천수 발굴 시추작업에 손대기를 꺼리고
있던차 이 관형이 당시의 온양읍 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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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
-20
의 대지에 구식 디딤 방아식 굴착기를 농기계
제작 전문가에 기술적 용역을 의뢰하여 개량된 공법을 가미
20 30m
파는 정도의 기능밖에 못미
치는 구식방식에서 탈피
150 200m
까지 파내려 갈 수 있는 비교적 대형화 굴착방법을 구사함
으로써 약
5
로부터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제
2,
제 의 새로운 온천광의 개발이 속속 이루어지게 되었고 온양의
3
온천수 사정은 밝은 전망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며 오늘날과 같은 많은 여관의 온천수 공급과
여러 곳의 대형 대중탕이 생겨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관형이 새로운 온천광을 개발 시추하기로부터 본격적인 활용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오랜시일에 걸친 법정시비와 여러 가지 요인들이 가로 놓여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한 것으로 나
타났다.
그리고 이 관형은 이와 같은 새광천의 개발을 계기로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제정되는 온천
법 제정과정에서 당시 행정관할 관청인 아산군의 사회과장 조중국에서 온천법 제정에 참고토록
많은 자료 지원과 온천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수년간의 걸쳐 몸소 체험했던 경험과 기술상의 소
중한 자료들을 제공 수자원 보호등을 위한 온천법 제정에 크게 공헌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당시 온천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우리 고장 당시 사회과장 조중국에 의하여 온양에서
제공되거나 시안으로 내놓은 온양의 자료가 많이 반영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서 일정때만 해도 일인들에 의하여 온천수가 특수층에게만 독점되어 옴으로서 온천장의
주민들이 온천수의 혜택을 고르게 못누렸던 지난날의 쓰라림을 없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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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이후 수복 당시
로부터 오랫동안 탕정관 소유 당시 관재국 소유 온천광의
6
4
40%
비율만으로 그것도
몇 개 여관만이 이용해 오던 온천수의 이용의 폭이 넓게 되고 현재와 같이 많은 온천광이 개발
되어 급기야는 온천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참고로 협업중인 대중목욕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목욕탕 대중탕
(1988. 6. 10
현재
삼보탕
온천동 238-1
신천탕
온천탕 206-30
신정관
온천동 242-18
양산탕
온천동 90-9
뉴서울탕
온천동 57-2
제일탕
온천동 217-2
옥수탕
온양시 모종동
청주탕
온천동 78-3
보건탕
온천동 90
온주탕
온천동 84-18
온양탕
온천동 90
현대탕
온천동 44-89
위 자료는
1990. 12. 30.
현재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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