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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공주를 사랑한 옛 사람
옛노래 ?
금강(錦江)을 건너며
백원철
공주대학교 교수
공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공
영남의 군중을 왕래하였다고 기록되어
의 문집 「仙源遺稿」
에는 금강과 공산성을
있다(又以都元帥權慄接伴使金
張雲翼從
두고 지은 시 5편이 보인다. 그 중 처음 지
事官
來湖嶺軍中). 권공이 도원수의 직
은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다음의 시이다.
위에 오른 때는 행주대첩을 거둔 1593년
이고, 그 후 해직되었다가 다시 충청도
강남 강북에 풀은 우거져 있고
순찰사에 이어 도원수가 된 것은 1596년
눈 가득한 봄 경치에 나그네 마음 산란하네
임을 감안한다면, 결국 김 공은 임란 중
근심스럽게 배에 기대어 옛 자취 둘러보니
종사관의 책무를 맡으며 공주지역을 왕
청산은 말이 없고 새들만 부질없이 지저귀네
래하였고, 그 시기는 1593년(선조 26년)
이거나 1596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江南江北草
滿目韶光客意迷
위 시는 위의 두 시기 중 어느 한때에
愁倚木蘭尋故跡
靑山無語鳥空啼
지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仙源遺稿上, 八「錦江」
>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흐른 뒤, 다시 금
위 시는 봄철에 금강을 건너며 지은 시
강을 건너며 지은 시 두 수가 있는 바,
인데도, 강 주변 경관의 싱그러움이 배제
다음과 같다.
되고, 지은이의 흥겨움도 담겨 있지 않다.
피향당 안에서 오래전 머물렀었는데
금강을 노래한 많은 여느 시와는 달리 그
옛 자취 아련히 한 꿈속의 일인 듯
정조(情調)가 어둡기만 한 것은 왜일까?
함께 놀던 정든 이들 이미 세상 떠나고
추정컨데, 아마도 위 시는 임진왜란의
늙은 이 몸만 다시 지나니 눈물이 흐르네
국난 기간에 무거운 책무를 떠맡은 공이
분망중에 읊은 것이라서 그렇게 된 것으
금강정 물가에 석양 빛 비치는데
산천은 그대로나 겪어온 세월은 달라
로 보인다. 실제로 공의 신도비(神道碑)
29년 지나 다시 이곳에 이르렀으니
글을 통해서 공의 행적을 살펴보면, 공은
누군들 알았으리오, 외로운 신세로 다시 올
권율(權慄)도원수의 종사관이 되어 호남과
것을!
公州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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