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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천포구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명천포구는 서울가는 길목이었으며
이 마을을 거쳐서 정미, 당진을 경유하는 노선을 이루었다. 서산읍을 중심으로 하는 교통량도 많았다.
그러나 성연면 소재지쪽의 대산선 국도가 포장되고 서울 가는 노선도 서산-음암-운산-당진을 연결하는
직선도로가 확장?포장되면서 이 지역 교통량은 급락했고 교통요지로서의 명천리 윗삼거리 기능도
마비되었다. 명천포구는 1973년에 사라졌다. 이 포구는 본디 조선시대에 해창을 두고 서산 일대 각 고을의
조세를 서울로 실어나르던 곳이었다.
윗삼거리는 서산, 당진방향, 아랫삼거리 방향으로 분기되는 곳으로 마명리에 있다. 아랫삼거리 방향으로
약 400미터 거리에 다시 삼거리가 형성되는바, 그 한 길은 말우리고개를 넘어 이웃 예덕리에 이르는
노선이다. 그리고 아랫삼거리는 윗삼거리와 연결되어 해성-예성리를 경유, 당진군 대호지면으로 이르며
명천포구를 끼고 있으며 그 반대방향으로는 면소재지를 거쳐 대산선과 만나 서산읍으로 연결된다.
명천리는 서산장을 본다. 예전에 명천에서 여객선이 다녀 인천으로 많이 나아갔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도 인천에 많이 나가산다. 그러나 차가 많아지고 배가 없어지자 이제는 서울로 더 많이 가는
편이다.
사례3.덕지천포
지금은 서산시가 되어버린 과거 서산읍 중심지의 동남방에 위치한다. 예전에는 오산면(
) 소속
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서령면(서산읍)에 편입되었다. 마을은 5개 자연마을이 4개반을
형성하고 있다. 자연마을은 뒷굴( 谷), 앞굴( 谷), 죽터, 참샘(참삼,
), 동쪽 등 5개로 나뉜다. 구릉성
산자락에 의지하여 발달한 소규모 집촌이다. 전주이씨, 전주김씨, 곡부공씨가 처음으로 들어왔으며
약 6-7대를 살았다고 전해진다. 총 가구수는 103가구이며 인구는 86년말 기준으로 596명이다.
덕지내라고도 부르며 천수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덕지천에서 온 말이다. 덕지천은 대교천과 해미천이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으로 덕지천리에서는 오푼강이라고도 부른다. 서산 천수만 간척지가
건설되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20톤 가량의 배가 들어오기도 했다. 천수만간척사업이 완공됨에 따라
해변마을의 광활한 간척지 배면에 위치한 내륙마을로 변하게 되었다.
덕지천은 일명 도당천이라고도 한다. 물의 근원이 음암면 면사무소에 있는 도당리 남쪽의 구릉지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부장리?신장리를 거쳐 덕지천동에서 해미천?대교천이 합수되어 내려오는
물과 합쳐 천수만으로 들어가고 있다.
서산읍과 해미면 사이의 넓은 해안평야지대를 따라 개설된 도로가 마을 중심부를 동남향으로 지나고
있다. 덕지천에는 해방 이전에는 댕기나 당줄, 갓끈을 지고 외지에서 들어와 장사를 하던 봇짐장수들이
있었으며, 난장도 있었다. 그러나 교통의 발달로 자연스레 난장도 없어지고 봇짐장수도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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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_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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