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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성곡리에많은사람들이살았다.농토는넓지않았지만가구수가대략200가구

남,
가넘었다.마을아래에서위쪽까지무려4키로,10리나되는마을이었다.전통지명도재


미있다.성곡은비실이라고했다.별성에골곡자인데비실이라한것이다.사실비실은별


실이변한것으로풀이한다.그밖에큰말,수래끝,대문걸이,외말,웃말,못아니,개아니,지


쟁이고개,수레삼거리등이전한다.


성곡리도전쟁으로피해를많이보았다.마을아래수레삼거리에서큰전투도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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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당시 젊은 사람이 끌려가다가 부상을 입었는데 창자가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살려
고죽은척하고있다가구조되어천수를누리다가작고하셨다고한다.
더욱심한피해는육백고지에숨어있던인민군들에게당한것이었다.마을에들어와쌀
이며, 소 등 닥치는 대로 가져갔다. 처음에 내려온 인민군들은 아주 얌전했다는데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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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이라불리던사람들이들어와해를입힌것이다.아마도전쟁말기에후퇴하던무리
들이그랬던것으로이야기가되고있다.
수레삼거리에서 돌아가신 분들 중에서 보훈 대상자가 된 사람은 없다. 분명히 그때 전
투하다가 사망했는데도, 유족들이 보훈 대상인 줄 모르고 있었고, 사망신고조차도 전쟁
이끝난뒤에집에서사망한것으로신고가되어증거자료와증인을내세워도보훈처에서
는 인정을 해주지 않았다. 지방에서 발행한 공로증도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보훈처에서
는 근거 없이 지자체에서 발행한 자료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확인하기도 어렵고, 또 그렇
게보훈을인정하면문제가발생하기때문에받아들일수없다는답만들었다고한다.유
족들이야큰보상보다도공을인정받고싶어서바라는바이지만여러가지문제점이있다.
고단했던과거
잠시성곡리를떠나서울에서일을하기도했다.가진토지가없으니매일남의일만해
서는 많은 식구를 건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물건을 취급하는
일이 있었다. 아는 사람을 통해 시작했는데 벌이가 좋았다. 미군부대 측에서도 폐품을 치
워주니 좋고, 소비하는 입장에서도 미군부대에서 나온 것이라면 선호하던 시절이라 찾는
사람들이많았다.
때로는쓸만한물건도나왔다.미군이버린것을다시조립하거나용접을해서활용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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