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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임석주
林錫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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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일사(逸士)·학자이다. 본관은 평택으로 조선 전기에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난 수겸(守謙)의
후손이며 생원 사징(士澄)의 아들이다. 자는 몽뇌(夢
), 호는 매헌(梅軒)이며 포저 조익(趙翼)의 문인이
다. 문장과 학문으로 선비들이 추천하여 교관(敎官)으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초에 기호
학파의 태두인 우계 성혼(成渾)과 율곡 이이(李珥)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논의하여 사론(士論)을 모두 승
복시켰으며 학문으로 재랑(齋郞-참봉)에 천거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은일(隱逸)로서 80세가 넘
게 살았고 그의 죽음에 명재 윤증(尹拯)이 만사(輓詞)를 지어 보내기도 했다. 묘는 예산군 대술면 으능정
이(은행정) 화산(花山)에 있다.
[95] 임수겸
林守謙
<1409(태종 9년) ~ 1492(성종 23년)>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택(平澤)이며 평택 임씨
아산 도고 지역 입향조다. 고려 말에 세자전객령(世子典客
令)을 지낸 평택 임씨 1세조 세춘(世春-世椿)의 증손이고
무(茂)의 손자이며 윤생(允生)의 아들이다. 자는 익지(益
之), 호는 갈곡(葛谷)·갈곡신옹(葛谷愼翁)이며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제자 김숙자(金叔滋)의 재종형인 김종리(金從
理)의 문인이다. 1447년(세종 29) 친시(親試) 문과에 급제
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고 1455년(단종 3)에 우정언
(右正言)에 임명되었으며 1457년(세조 3)에 좌익원종공신
<임수겸이 지은 연정>
(左翼原從功臣) 3등에 책훈되었다. 1466년(세조 12)에 사
예(司藝)로, 이어 사성(司成)에 제수되어 성균관과 종학·사학 등에서 교육과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이
후 전라도관찰사와 호조·예조참의(參議)·대사성(大司成)·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했다. 세조가 늘 편
전에 불러들여 정사를 논의하고 총애했으며 이후 부제학에 올랐으나 곧 관직에서 물러나 신창현, 현재의
아산시 도고면 화천리로 퇴거(退去)했다. 1470년(성종 1)에 사표(師表)로 부름을 받고 주자(胄子-세자)를
가르쳤으며 이듬해에 동지성균관사에 올라 오랜 동안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1482년(성종 13)에 사직하고
물러나 화천리로 내려와 머물렀다.
이때 그 곳에 정자를 짓고 연정(蓮亭)이라 하였으며 이후 후손들을 교육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그 뒤
쇠락해진 것을 1955년에 16세손 임달선(林達善)이 중수해서 마을 서당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84세에 졸
하였고 묘는 시호는 신옹(愼翁)이며, 수원(화성시) 봉담면 봉서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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