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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효열정려지
[51] 효자 조상우 <趙相禹>
1582(선조 15) ~ 1657(효종 8)
대변 맛보며 부모 병세확인한 효자
조선 중·후기의 학자이자 효자이다. 본관은 양주(楊洲)이고 온양에서 평생을 살았다.
아버지는 부사과(종6품)를 지낸 조지유(趙之柔)이고 어머니는 평산(平山) 한(韓)씨이
며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의 이름은 학성(學聖)이고 성인이 된 뒤에 갖게 된 또 다른
이름인 자(字)는 하경(夏卿)이며 호는 시암(時菴)이다.
본래 품성이 올곧았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또한 진지하게 학문을 연마하여 예
학에 정통하고 의리에 밝았다. 뒤에 예학의 대표적 학자인 사계 김장생(金長生) 선생의
문인이 되어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향시(지방에서 보는 과거의 1차 시험)에 1등으로
합격했지만 아버지의 병으로 복시(2차 시험)에 응시하지 않은 뒤에 과거 공부를 중단하
고 온양에 머물면서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다. 설화산 아래, 지금의 아산시 장존동에 석
우정(石友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잠야 박지계, 포저 조익, 동춘당 송준길, 신독재 김집,
후천 황종해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교유했다. 또한 1634년(인
조 12)에 배방면 중리 점토곡에 정퇴서원(靜退書院)을 건립하는 일을 주도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으며 부모가 병이 나면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확인했다. 부모의 상을 당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고 삼년상을 모시면서 여막에서 시
묘하며 애통해 하였다.
효종 때 학문의 성취로 천거되어 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65년
(현종 6) 왕의 온양행궁에 행차하였을 때 온양 생원 이문영(李文榮)이 그의 효행을 알리
는 상소를 올려 아들 조이숙(趙爾?)과 함께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또한 온양의 대표적
인 학자로서 1670년(현종11)에 자신이 세운 정퇴서원에 모셔지고 이조참판(종2품)에
추증되었다.
그의 효자 정려는 온양 장존리에 세워졌으나 1665년에 묘소가 있는 온양의 온천동 산
18번지로 옮겼다. 그러나 지난 2003년 11월 19일 현대홈타운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모
두 공주시 유구읍 만천리 산으로 옮겨졌다. 현대홈타운 상가 앞에 조상우·조이숙 선생
의 정려지임을 알려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정려가 있던 장존동에는 정문거리라는 지
명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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