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80페이지

58페이지 본문시작

던 노인이 들어가자 중은 며느리에게 살며시 말했다
. "
지금 집에서 멀리 가시오 곧 재
난이 닥칠터이니 빨리 떠나시오 단 가다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되오 중은 의혹의 말
"
을 남긴 채 떠나 버렸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빨리 떠나자고 하자 노인은 한사코 거절
하며 화를 냈다 며느리는 아기를 업은 채 집을 나왔다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불고 무언
가 무너지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여인은 돌아보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며
느리는 너무 궁금하여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 으리으리한 집 넓고 기름진 문전옥답이
씻기고 큰 연못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그녀는 아기 업은 형상의 바위로 변
했다 남편이 성실한 일꾼이 되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사라진 후였고 욕심많은
시아버지를 동정하고 효성스런 아내에 감복하였다 한다 그 후 이 바위를 아기업은 바위
혹은 어금니 바위라 하였다.
8)
전통놀이 및 대표적 집단 행사
서원골 마을은 정월 대보름에 풍악 윷놀이 음식을 나누면서 서로 마을 주민간의 화합을
도모하며
8
12
말일에 마을 일을 서로 의논하면서 마을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와내 마을은
5
8
을 도모하고 청년회에 상조회가 있어 마을 어른이 상을 당했을 때 도와주고 있다.
9)
특별하게 소개할만한 인물
인산서원에 배향 되었던 인물들중에서 몇 몇 분들을 이곳에 소개 하고자 한다.
김굉필
金宏
: 1454 1504
단종
2
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서홍
자는 대유
호는 사옹
한훤당
김종직
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고
, 1480 (
년 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
균관에 입학하였다
. 94
년 이극균
克均
의 천거로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생활이 시
작되었다
. 96 (
년 연산군
2)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 98
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
목으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
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썼으며 조광조
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1504 (
년 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뒤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
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되었는데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
입은 바 컸다 그 결과
17 (
년 중종
12)
정광필
신용개
등에 의하여 무고하
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 77 (
년 선조
10)
에는 시호가 내려졌고
1610 (
년 광해군
2)
에는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상소에 의하여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오현
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학문적으
로는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유학사의 정통을 계
승하였다 저서로는
경현록
》 《
한훤당집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
조광조
1482 1519
성종
13
중종
14)
조선 중기 문신 성리학자 자는 효직
호는 정암
본관은 한양
김굉필
金宏
의 문인으로 김종직
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
의 영수
이다 김
굉필 정여창
이황
과 함께 동방 현
4 (
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 1510
중종
5)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업에 전념하였다
. 15 (
년 중종
10)
학행으로 천거받아 조지서사지
에 초임되었고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
하여 전적 감찰 공조좌랑 홍문관부수찬 교리 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정언으로 재직중 박원
김안로
등 반정
공신들이 주장한 왕비 신씨
폐출론에 반대
하는 한편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왕도정치
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 17
년 경연시독관과 춘추관기주관을 겸임하면서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
의 실시를 주창
도에 걸쳐 실시하게 하였다
. 18
년 부제학으로 있을
당시 미신타파를 내세워 소격서
의 폐지를 강력하게 주청
하여 많은 반대에
도 불구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해
11
월 대사헌에 승진하고 현량과
를 처음 실시
하게 하여 김식
등 소장학자들을 선발 요직에 배치하였다 이들 신진사류들은 훈구
세력의 타도와 구제
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박차를 가해 나갔
. 19 (
년 중종
14)
정국공신
國功
위훈삭제
를 강력하게 청하다가 훈구파

58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