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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2019
제53호
제53호
지역학칼럼
충남학특강-충남의역사문화바로보기
또한 내포의 지성사적 전통은 금강유역의 유교문화와 그 경향이 약간 다르다. 내포문화는 시대
학을주도했던사계김장생과신독재김집,우암송시열,동춘당송준길,초려이유태같은당대석
변화에매우빠르게대처한선진,다양성을보인다.백제시대의대중국교류나,라말려초의내포불
학들이활동한무대도바로이곳충청도였던것이다.
교에서 보여준 모습, 그리고 조선후기 실학의 발전, 천주교의 이른 전파와 교세확장, 한말 홍주의
병으로 대표되는 의병활동, 그런가하면 동학농민군의 활동도 만만치 않은 곳이 내포지역이었다.
그런데 오늘 날 일부의 문화비평가들은 이러한 양반문화, 선비문화를 권위나 입신양명, 나아가
그뿐이 아니다. 한말 홍주의병을 주도한 김복한, 이설, 임한주를 비롯하여 개화·민족운동의 대표
당파세력, 봉건적 착취세력 등으로 평가절하 하려는 경향도 보게된다. 그러나 만약 양반이나 선비
적 인물들이 내포출신이었음을 우리는 주목하게 된다. 윤봉길, 김좌진, 한용운, 이상재, 이남규 등
의 정신이 그런 것이었다면 충절의 행적에서 보듯 과연 목숨을 내어 던지며 환란을 자초한다든지,
등기라성같은인물들이이곳에서태어나성장했다.
도끼를 등에 지고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하는 행적은 결코 보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관념적인 것보다는 실천가이자 현실개혁의 이론가들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특권세
력의 사회경제적 독점에 반기를 들고, 향촌의 자율성을 추구하던 양심세력이기도 하였다. 그랬기
내포 천주교와 순교사도 이 지역문화의 큰 특징으로 부각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의
때문에조선시대수백년은양반중심의시대가될수있었던것이다.
고향은 충남 당진이다. 그리고 충남의 서해안 지역에는 서산의 해미읍성, 보령의 갈매못, 당진 솔
뫼 성지, 예산 신리 공소와 이존창 생가 터 등등 천주교 순교지가 곳곳에 있다. 서산을 비롯한 태
이들산림들이가졌던선비정신은결코보수적·관념적이라고평가될성질의것이아니것이다.
안, 홍성, 예산 등 내포지역이 우리나라의 초기 천주교인들을 길러낸 못자리판으로 이후 경기, 영
그보다는 오히려 너무나 개혁적·혁신적이고 강경하여 그들의 주장이 보수진영의 강한 견제를
남, 호남으로 옮겨 심었던 것은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다. 또 성향을 약간 달리하기는 하지만 해안
받을 정도였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조선조의 충청도 선비정신에서 오늘날
과 도서지역에 남아 전하는 갯벌 민속문화의 존재라든가, 저산팔읍을 휘돌며 상권을 장악했고 때
올바르게본받고배울것이있다면,그것은바로오늘의우리에게부족하고퇴색된이러한현실비
로는서울을넘나들면서정치세력을형성하였던보부상단의거점도이곳이었다.
판과개혁정신을우선적으로되찾는일일것이다.
양반,선비문화의본고장-호서유학과지성사적전통-
호서사림이중앙정계에대거진출하여두각을보이기시작한것은인조반정이후의일이다.서인
이 주도한 인조반정이 ‘崇用山林’의 기치 아래 산림을 등용하게 되자 호서사림이 정계에서 큰
또 하나 충청도에 붙어 다니는 수식어가 바로 “양반(兩班)”이다. 충청도에서는 불사이군의 충
활약을 한 계기가 되었다. “山林”은 ‘山谷林下에 은거한 학덕을 겸비한 학자’를 일컫는 말로
절을 실천한 많은 사림과, 국가가 혼란에 처했을 때 멸사봉공의 선비정신을 발휘하며 조선조 예론
산림의 등용은 학파 정파에 구애되지 않고 사림의 학문적 중심인물들을 중용하는 것으로 이것은
(禮論)의메카로불려지듯확고한지식인문화의이미지가강하다.
성리학적인 붕당정치의 상호비판체제를 구현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인조-효종의 산림등용으
로沙溪의학맥에서모두14명의산림이배출되었고이들은거의호서지역출신이었다.산림이중
실제로 조선조 문과급제자의 52%가 충청도 인물이라는 통계가 말해주듯 선비들의 밀집지이기
용된 인조 1년(1623)에서 숙종 20년(1694)까지 징소된 산림 35명을 지역별로 보면 충청도 16
도하였고,이중환은이러한사정을그의저서『택리지(擇里志)』팔도총론에서“산천이평평하
명,경상도6명,전라·경기각3명으로호서지역이절대적인수를점유하고있었다.
고예쁘며,서울이가까운위치여서사대부들이모여드는곳”이라고지적할정도였다.
율곡의 嫡傳인 金長生(1548~1631)이 출현하고 金長生·金集(1574~1656) 부자의 학맥
고려말 조선초 성리학이 수용되던 시기에 불사이군의 충절을 실천했던 중요 인물들의 태생지와
을 계승한 宋時烈(1607~1689), 宋浚吉(1606~1672), 李惟泰(1607~1684), 兪棨(1607~
활동근거지가충청도였고,사림정치가정착되기이전에어려운조건속에서선진적인성리학을부
1664), 尹宣擧(1610~1669) 등 호서산림 인사들이 특색 있는 학문 활동을 벌이면서 명실상부
식하기에 노력했던 인물들도 많았던 때문에 중봉 조헌으로 대표되듯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
한 호서학맥을 형성하게 된다. 한편 성혼-윤황-윤선거-윤증으로 이어지는 우계학파의 학풍도
릴 수 있는 충절 정신의 대표적 인물들이 대를 이어 배출되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중·후기의 예
있고, 율곡 남인계열의 權得己(1570~1622) - 權?(1604~1672) - 權以鎭(1668~1734)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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