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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예산학 특강 - 禮山이 낳은 금석학자 秋史 金正喜 재조명
28년, 지부산(之?山)에 올라 비석을 세워 진의 공덕을 노래하였다. …… 29년, 시황제가 동유
에 가서 선왕이 순방(巡方)한 자취를 추술(追述)하여 구지(舊址)에 세운 것이라 하였다.
39)
김정희와
가깝게 지냈던 침계(?溪) 윤정현(尹定鉉: 1793~1874)의 제자로 역시 김정희를 따랐던 어당(?堂
(東游)하여 지부산에 올라 비문을 새겼으며(비문 전함), 또 (지부산의) 동관(東觀)에 비문을 새
) 이상수(李象秀: 1820~1882)도 비슷한 견해를 표한 바 있었다.
40)
이러한 의안(疑案)을 해소시키지
겼다(비문 전함).
못한 책임은 일단 김정희에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정희의 고증에 수긍할 수 없는 측면이 있
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2) 비문을 먼저 새겨 세운 경우
필자는 진흥왕의 순수라는 역사적 사실과 비를 세운 연대는 구분해야 된다고 본다. 진흥왕 북순
28년, 낭야대를 짓고 석각을 세워서[立石刻] 진의 공덕을 노래하였다(비문 전함).
(北巡)의 도정(道程)이 여러 달에 걸친 긴 기간이었음에 비추어 본다면, 같은 날에 북한산·황초령·
37년,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대우(大禹)를 제사하고 남해(南海)를 바라보며 석각을 세웠다(비
마운령 세 곳에서 동시에 비가 건립될 수 없음은 사리로 보아 자명하다.
41)
결국 어느 정도 시차를
문 전함).
두고 세워졌을 것이다. 이것은 진흥왕 북순비의 모델이 되었으리라고 짐작되는 진시황 순수비의 경
뒷날 이세황제(二世皇帝)가 추각(追刻)한 경우
우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세황제 원년, …… 시황제가 건립한 비석에 모두 글자를 새겼다.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재위: B.C 246~210)은 B.C 221년에 천하를 통일한 뒤, 재위 28년과 29
년, 37년에 천하 각지를 순행(巡幸)하면서 자신의 순수비(송덕비)를 세웠다. 모두 여섯 군데에 비를
‘입석(立石)’, ‘각석(刻石)’, ‘ 각입석(所刻立石)’, ‘입석각(立石刻)’이 뚜렷이 구분되어 있다. 지부산
세웠다. 이 중에서 다섯 개의 비는 비문이 전한다. 현재 남아 있는 각석(刻石)은 산동성(山東省)의
에 세운 두 개의 순수비의 경우, 비석을 먼저 새우고 나중에 비문을 새기기까지 1년 가량 걸렸음을
태산(泰山)과 낭야대(琅邪臺) 두 곳뿐이다. 이 비의 글씨는 전자(篆字)의 기본으로서 오늘날까지 서
알 수 있다.
43)
이 경우에 비추어 보면, 순수와 입비(立碑)가 반드시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예의 교본이 되어 왔다. 6개의 비석이 어떻게 세워졌는지 유형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시간차가 있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더욱이 순수비의 건립이 국가적으로 큰 일이고 보
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것만은 아니다.
(1) 비석을 먼저 세우고 비문을 나중에 새긴 경우
결국 무자 8월 21일은 진흥왕이 봉강(封疆)을 위해 순수를 떠난 날이요, 비는 그 뒤에 이를 기념
28년, 동쪽으로 군현을 순행하던 중에 추역산(鄒?山: ?山)에 올라 비석을 세우고, 노(魯) 지
하기 위해 세워졌을 것이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실마리를 풀어나갔더라면 얽히지 않았을 터인데,
역의 여러 유생들과 상의하여 비문을 새겨 진의 공덕[秦德]을 노래하였다(비문 전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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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견해가 엇갈렸던 것이다.
28년, 태산에 올라 비석을 세우고 토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 양보산(梁父山)에
『완당전집』을 보면, 조인영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황초령·북한산) 두 비의 문자가 서로 같은 곳이
서 선(禪) 행사를 치르고 세워진 비석에 비문을 새겼다(비문 전함).
많은 것을 보면 두 비를 동시에 세운 것이 확실하다. 그 시기 또한 모두 진지왕 때에 있었던 듯하다”
라 하였다. 『진흥이비고』에서는 순수비는 진흥왕 자신이 만들어 세운 것이라고 하면서 “법흥이니 진
흥이니 하는 칭호는 세상을 떠난 뒤에 일컬은 시호가 아니요 생존시에 부른 칭호였다”고 하였다. 이
처럼 김정희 자신도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견해를 보였던 만큼 후학들 사이에 이견이 있을 것임은
39) 『恩誦堂集』 속집 文卷1, 18a~18b, 「新羅眞興王巡狩碑拓文書後」(총간 312, 244쪽). 이상적은 이 글에서 “著錄家以爲此
필지(必至)의 일이 아닐까 한다.
碑建於眞興王二十九年戊子, 在中國爲陳光大二年也. 以巡狩之時, 訂建碑之歲”라 하여, 스승 김정희의 성명을 忌諱한 대
신 “往在道光辛卯秋, 亡友劉燕庭方伯見示手輯海東金石苑八卷, 首載此碑, 亦稱陳光大二年建”이라 하여 유희해를 자신
김정희는 조인영에게 보낸 서한에서 ‘남천(南川)’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하였
이 말한 ‘저록가’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유희해의 견해가 곧 김정희의 견해를 수용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다. 진흥왕 29년(568)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폐하고 남천주를 세웠으며, 진평왕 26년(604)에 다
40) 『?堂集』(규장각소장본) 권15, 「眞興王北狩碑跋」 참조. 
41) 그럼에도 三碑가 모두 ‘戊子八月二十一日’이라 한 것은, 고대 帝王들의 巡狩가 仲月에 이루어졌던 전례를 따르기 위함이
라고 본다. 『史記正義』, 「진시황본기」 29년조를 보면 “古者帝王巡狩, 常以中月”이라 하였다. 8월은 가을로 中月(仲月)이
다. 『백호통의』 「巡狩」에 의하면, 仲月 가운데 2월과 8월은 춘분과 추분이 있어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5월과 11월은
하지와 동지가 있어 음과 양이 정점에 이르러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42) 약칭 ?山碑는 『사기』 「진시황본기」에는 비문이 전하지 않지만, 송나라 때 鄭文寶가 모각한 탑본이 전한다. 우리나라에
서는 谷雲 金壽增이 번각한 바 있다. 송시열, 『송자대전』 권147, 「重刻?山碑跋」 및 「秦篆刻帖跋」 참조. 
43) 이에 대해서는 서예가 李銀赫 씨의 교시가 있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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