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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 서기
1500
년경 약
500
년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원골 마을의 형성년대는 서기
1850
년경 약
150
년으로 추측이 가능하며 원골 마을에는
처음에 두채의 집이 있었는데 그중 한 집이 박씨 성을 갖은 사람이었다고 하며 이 마을
3
6)
지 명
서원골 마을의 지명
서원골 선골
서원리의 주된 마을로 인산서원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
기와내
원골에서 발원하여 기와내 마을을 거쳐 곡교천으로 들어가는 내
와내 기와내
서원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기와점이 있었음
서원교
서원리에 있는 다리
인산서원터
서원골에 있는 인산서원의 터 광해
2
(1610 )
년 에 서원을 세우고 영인
산의 이름을 따서 인산서원이라 하여 한훤당 김 굉필 일두 정 여창 정암 조 광조 회재
이 언적 퇴계 이 황 덕양 기준 토정 이 지함 만전 홍 가신 송파 이 덕민 잠야 박 지
계를 배양하였는데 고종
5
(1868 )
년 에 헐림
기와점터
기와내와 강청리의 속샘 말 사이 큰 동쪽에 있는 기와점의의 터로 옛날 이곳
에서 기와를 구워냈는데 현재 기와 조각이 많이 있으며 집 한채가 있음
동막골
기와내 뒤에 있는 골짜기
원골마을의 지명
원골
서원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이조때 불장원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수정이 나왔다
성낭당 고개
기와내에서 강청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성황당이 있음
어금니 바위 애기 업은 바위
원골 뒷산에 있는 바위 그 형상이 아기 업은 형상이기
도 하고 또는 흰 어금니와 흡사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아산군의 이름이 이것으로 인하여
생겼다고 함.
7)
전 설
서원제에 관한 전설 서원골 마을
조선중기 당파싸움이 한창일 때 노론의 한 사람이었던 함양 박씨인 지상은 고향인 서원
리로 낙향하여 이미 자리잡고 있던 함양 홍씨의 편서의 일가와 뜻을 같이하여 의논 끝에
세운 서원이 인산서원이다 정조때 국가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으나 정계에서 밀려나 다
시 서원리로 돌아와서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그곳을 서원제라 한다 규모가 무척이나 작았
던 그곳은
6·25
때 파손 그 자리만 남아 있었으며 그 후손이 보존하고 있다
어금리 바위의 전설
고려말 이곳에 돈 많고 부자인 욕심장이 노인이 있었다 그는 많은 땅이 있었으므로 그에
따른 소작인들 또한 많았다 노인에게는 칠삭둥이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소작인들 중
한 딸을 며느리로 맞으려고 무척이나 애쓰고 있었다 가난한 농사꾼의 처녀이기는 하나
아름답고 현명하여 누구 못지 않게 많은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노인은 몇번이나 청혼을
했지만 승낙을 받아내지 못하자 소작할 땅을 주지 않겠노라고 엄포를 놓았다 소작을 하
여 겨우 생계를 이어 가는 이들 부부에게는 보통의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효성스런 그집의 딸은 스스로 혼인 하겠다고 나섰다 부모는 펄쩍 뛰었지만 외동딸
의 갸륵한 마을을 저버리지 못했다.
혼인을 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큰 흉년인데도 구두쇠 노인의 광에는 양식이 그득
했고 며느리는 동냥 온 이들에게 무언가를 몰래 주곤 하였다 또한 남편을 설득시켜 학
문에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아버지인 노인은 칠삭둥이인 아들이 무얼 하
겠냐며 아들을 쫓아 버렸다 그 후 며느리는 임신을 했고 노인의 심술은 날로 더욱 심해
져만 갔다 어느날 초라한 중이 시주를 하러 왔고 며느리는 여느때처럼 몰래 쌀을 한 바
가지 시주했다 그런데 그 광경을 지켜본 시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며 쌀을 다시 빼앗고는
외양간의 쇠똥을 가득 뒤집어 씌우고 시주 그릇에 가득 담아 주었다 거친 욕설을 퍼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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