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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속으로는 은근히 좋았다. 다음날 뜻이 맞은 두사람은 결혼을 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모아
놓고 잔치를 하였다. 가난한 집에서 어떻게 잔치를 할까 동네 사람들은 의문이였지만 여인
이 이곳에 오면서 보물을 가져온것이었다. 총각은 너무나 기뻤다. 돈에 예쁜 색시까지 생기
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둘은 남은 돈으로 논과 밭을 사고 그들의 금실은 부러울 만치 좋았
다. 그러나 한가지 여인은 자정이 되면 어디론지 나갔다 오곤 하는 것이었다. 총각은 몇번이
고 그런일을 목격했지만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러나 소문은 동네에 퍼지고 말았다. 동네 사
람들중에서도 여자가 늦은 밤에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었고 급기야는 여자가
여우로 둔갑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모를 심고 있는데 여인이 밥을 해
가지고 나오는데 그만 치마 사이로 꼬리가 나온 것을 한 동네 사람이 보고 괭이를 들고 때
릴려고 할 때 그녀는 여우로 변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그녀가 도망치는데 난데없는 맑은 하
늘에 천둥과 벼락이 여인은 간데 없고 치마를 두른듯한 큰 바위가 나타났다. 그 바위가 치
마를 두른 여인 모습 이라 하여 치마 바위라 불리게 되었다.
금곡리
아산에서 유명한곳을 들자면 여러군데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맹씨행단은 빼놓을수 없는
아산의 유적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맹씨행단은 중리에서도 2구 마을로 옛 이름은 금곡동이
였다. 맹씨행단은 고려시대의 명장 최영장군의 집인 것을 그 손서 고불 맹 사성에게 주어서
그때부터 맹씨들이 살기 시작했는데, 독특한 고려 양식과 다비식을 가미해 지은 건물로서
한가운데 대청이 두간이고, 양쪽에 방한칸씩 있으며, 기둥과 도리새에는 단포로 봉의 혀로
장식하였으므로 고적 제 154호로 지정 되었고, 이집에는 맹 사성이 쓰시던 옥통수 1개, 목포
1, 포도연과 맹 사성의 부인이 쓰던 옥잠 1개가 전하여 온다.
맹씨 행단이라 한 것은 맹 사성 고택 앞에 270년 된 은행나무 두주가 쌍으로 서 있고, 단으
로 둘러 쌓았으므로 행단이라 하는데, 맹 사성이 심은것이라 한다.
맹사성을 소개하자면 호는 고불이며, 고려말부터 조선 초기의 정치가로 이 고장에서 최고의
인물로 손꼽히며, 청렴결백한 자의 표상이기도 하다.
맹사성을 낳기전 어머니가 태몽을 꾸었는데 태양을 삼켰는데 그후로 맹사성을 낳게 된것이
라 한다. 그의 아버지는 맹희도라 하는데,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고려 공민왕 1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아버지 상서공유공께서 절개를 지키며, 사문동에 들어가자 따라서 벼슬을 그
만두고, 현재의 배방면 중리인 이곳에 살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맹희도를 제향하던 사
우를 금곡서원이라 하는데, 1837년 4월 20일 그의 옛집에 서원을 세우고 금곡서원이라 칭하
게 되었으나, 건립된 이후의 연혁은 알수 없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 (고종8년)에
철폐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다.
마을에는 효자 맹희도와 효자 맹사성 효부 양주 조씨, 효자 맹흠규의 정려가 있는데, 맹 사
성 정려의 안에는 명정현판과 비가 봉안되어 있다. 효부 양주 조씨는 맹희도의 처로 조선조
현종때 정려를 하사 받았고, 맹흠규는 맹사성의 후손으로서 정려를 받은 시기 및 관직등은
비의 훼손으로 알아 볼수 없다.
중리 3구를 가는 도중에 정자가 있는데, 구괴정이라 부르고 있다. 구괴정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년전 세종대왕이 직위하여 있을 때 고불 맹사성은 좌의정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삼인
제상 (황희, 맹사성, 허형)이 세본씩 기념수로 느티나무 9그루를 심은 것이 여덟그루는 중간
에 죽고, 오직 한그루만이 살아서 생장 하였다. 이 나무가 고목이 된 후에 곁에서 나온 곁순
나뭇가지 하나가 커있으며, 원래의 고목은 죽어 썩어서 없어지고, 오직 한그루(곁순) 가지만
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데 이것이 있는 곳을 구괴정이라 부르고 있다. 이 구괴정에서 정사를
논하고, 시를 지어 담론 하였으며, 농번기에는 농부들을 불러 격려를 하여 농심을 불러 일으
키던 곳이였다. 지금은 낡은 정자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 정자를 지어 보존하고 있다. 구괴
정 옆에 있는 마을을 삼선당이라 부르는데 고불 맹사성에 얽힌 이야기중 삼선당에 얽힌 설
화가 내려오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구괴정에서는 맹, 황, 허 삼정승이 한자리에 모여 국
사를 논하기도 했다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 자리를 가리켜 삼산당 혹은 삼신당이라 일컫어
내려오게 된것이 600년이 넘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이외에도 맹사성에 대한 이야기는 많으나 그중 검은소에 대한 설화이다.
맹정승은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늘 검은소를 타고 서울을 다녔다. 당시의 정승이면 사인
교를 타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그는 항상 검소하고 서민적이었다.
어느날 조정에 일이 없어 집에서 책을 읽다가 머리나 식혀볼 겸 밖으로 나와 설화산을 오르
놓고 잔치를 하였다. 가난한 집에서 어떻게 잔치를 할까 동네 사람들은 의문이였지만 여인
이 이곳에 오면서 보물을 가져온것이었다. 총각은 너무나 기뻤다. 돈에 예쁜 색시까지 생기
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둘은 남은 돈으로 논과 밭을 사고 그들의 금실은 부러울 만치 좋았
다. 그러나 한가지 여인은 자정이 되면 어디론지 나갔다 오곤 하는 것이었다. 총각은 몇번이
고 그런일을 목격했지만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러나 소문은 동네에 퍼지고 말았다. 동네 사
람들중에서도 여자가 늦은 밤에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었고 급기야는 여자가
여우로 둔갑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모를 심고 있는데 여인이 밥을 해
가지고 나오는데 그만 치마 사이로 꼬리가 나온 것을 한 동네 사람이 보고 괭이를 들고 때
릴려고 할 때 그녀는 여우로 변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그녀가 도망치는데 난데없는 맑은 하
늘에 천둥과 벼락이 여인은 간데 없고 치마를 두른듯한 큰 바위가 나타났다. 그 바위가 치
마를 두른 여인 모습 이라 하여 치마 바위라 불리게 되었다.
금곡리
아산에서 유명한곳을 들자면 여러군데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맹씨행단은 빼놓을수 없는
아산의 유적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맹씨행단은 중리에서도 2구 마을로 옛 이름은 금곡동이
였다. 맹씨행단은 고려시대의 명장 최영장군의 집인 것을 그 손서 고불 맹 사성에게 주어서
그때부터 맹씨들이 살기 시작했는데, 독특한 고려 양식과 다비식을 가미해 지은 건물로서
한가운데 대청이 두간이고, 양쪽에 방한칸씩 있으며, 기둥과 도리새에는 단포로 봉의 혀로
장식하였으므로 고적 제 154호로 지정 되었고, 이집에는 맹 사성이 쓰시던 옥통수 1개, 목포
1, 포도연과 맹 사성의 부인이 쓰던 옥잠 1개가 전하여 온다.
맹씨 행단이라 한 것은 맹 사성 고택 앞에 270년 된 은행나무 두주가 쌍으로 서 있고, 단으
로 둘러 쌓았으므로 행단이라 하는데, 맹 사성이 심은것이라 한다.
맹사성을 소개하자면 호는 고불이며, 고려말부터 조선 초기의 정치가로 이 고장에서 최고의
인물로 손꼽히며, 청렴결백한 자의 표상이기도 하다.
맹사성을 낳기전 어머니가 태몽을 꾸었는데 태양을 삼켰는데 그후로 맹사성을 낳게 된것이
라 한다. 그의 아버지는 맹희도라 하는데,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고려 공민왕 1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아버지 상서공유공께서 절개를 지키며, 사문동에 들어가자 따라서 벼슬을 그
만두고, 현재의 배방면 중리인 이곳에 살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맹희도를 제향하던 사
우를 금곡서원이라 하는데, 1837년 4월 20일 그의 옛집에 서원을 세우고 금곡서원이라 칭하
게 되었으나, 건립된 이후의 연혁은 알수 없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 (고종8년)에
철폐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다.
마을에는 효자 맹희도와 효자 맹사성 효부 양주 조씨, 효자 맹흠규의 정려가 있는데, 맹 사
성 정려의 안에는 명정현판과 비가 봉안되어 있다. 효부 양주 조씨는 맹희도의 처로 조선조
현종때 정려를 하사 받았고, 맹흠규는 맹사성의 후손으로서 정려를 받은 시기 및 관직등은
비의 훼손으로 알아 볼수 없다.
중리 3구를 가는 도중에 정자가 있는데, 구괴정이라 부르고 있다. 구괴정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년전 세종대왕이 직위하여 있을 때 고불 맹사성은 좌의정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삼인
제상 (황희, 맹사성, 허형)이 세본씩 기념수로 느티나무 9그루를 심은 것이 여덟그루는 중간
에 죽고, 오직 한그루만이 살아서 생장 하였다. 이 나무가 고목이 된 후에 곁에서 나온 곁순
나뭇가지 하나가 커있으며, 원래의 고목은 죽어 썩어서 없어지고, 오직 한그루(곁순) 가지만
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데 이것이 있는 곳을 구괴정이라 부르고 있다. 이 구괴정에서 정사를
논하고, 시를 지어 담론 하였으며, 농번기에는 농부들을 불러 격려를 하여 농심을 불러 일으
키던 곳이였다. 지금은 낡은 정자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 정자를 지어 보존하고 있다. 구괴
정 옆에 있는 마을을 삼선당이라 부르는데 고불 맹사성에 얽힌 이야기중 삼선당에 얽힌 설
화가 내려오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구괴정에서는 맹, 황, 허 삼정승이 한자리에 모여 국
사를 논하기도 했다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 자리를 가리켜 삼산당 혹은 삼신당이라 일컫어
내려오게 된것이 600년이 넘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이외에도 맹사성에 대한 이야기는 많으나 그중 검은소에 대한 설화이다.
맹정승은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늘 검은소를 타고 서울을 다녔다. 당시의 정승이면 사인
교를 타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그는 항상 검소하고 서민적이었다.
어느날 조정에 일이 없어 집에서 책을 읽다가 머리나 식혀볼 겸 밖으로 나와 설화산을 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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