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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한다면다보냈어요

남,
대한민국의부모들은교육열이대단했다.없는살림에도어떻게해서든지학교에보냈

던힘이현재의대한민국을있게한저력이다.그러나딸들에게있어서는절대적으로예외



였다.장녀는살림밑천이라고했다.부모님밑에서집안일을하다시집을가서도살림으로


평생을다보내는것이운명처럼받아들여졌다.


성곡리의임씨집안은특별한집안이었다.아들,딸,남녀의차별이없었다.학업에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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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면누구든지학교에보냈다.여자는초등학교만나와도대단하게여기던시절에여자들
도대학까지교육을시켰다.고모중한명이서울의진명1회를졸업하신분이있다.남자
어르신중에와세다에서유학한할아버지도계신다.
할아버지는일찍인삼을재배해돈을벌었고,집안에서공부한다는자손에게는지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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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지않으셨다.당신은공부를안했어도형제들을열심히지원만하셨다.
사촌셋이이리임업고등학교에입학하였다.그중에서임희재부친이가장공부를잘했
다고 한다. 한 분은 임업으로 청원군에서 공무원을 하셨다. 극작가 임희재 선생의 부친은
교편을잡았다.나머지한분도공무원을하셨던것으로기억한다.
갤러리,화랑에서일하다
금산에서 초중고를 다녔다. 대학은 진학하지 않고 서울에 있는 갤러리에서 일을 했다.
상호는 명동화랑이었다. 고종사촌 매부의 화랑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60년대, 명동, 150
평 정도의 갤러리, 그 때는 먹고 살기 어려워서 문화 예술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던
때였다. 배고픔을 달래기 어려운 시절에 화랑을 경영한다는 것은 시대를 매우 앞서가는
것이었다.
화랑이라면 작가들에게 전시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화랑에서 일했지만 화랑을 경영
한다든지,코디를했던것이아니라,전시가끝나고작품이팔리면작품을운반해주고위
치를잡아설치하는일을주로하였다.화랑에서일하기시작한것은69년도7월6일에제
대하고부터였다.특별히일할곳도없고또집안의일이라고생각해서발을들여놓았다.
당시미술에대하여배울수있는곳도없고또전공자도별로없었던시절이었다.수준높
은관람객도많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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