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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의 서원 역사와 서원 복원의 필요성
이천(武夷川)이 두 갈래로 흘러 회암동의 아름다운 사계절의 자태를
볼수있다. 옛선비문화를고스란히간직한회암동은동천(洞天)이라
불릴 만하다.
5. 맺는말
죽천 김진규가 덕산에 유배와 한산이씨 집성촌 봉림골을 찾았을
때 주자가 살았던 중국과 산명(山名)과 동명(洞名)이 같은 서원골을
발견한다. 이를답사한 김진규는 이러한 지명은우연한 것이아니라
생각하고지방선비들에게 회암서원을짓고유학의 강론(講論)장으로
활용할것을건의하여37개의읍선비들이찬동하여충청도관찰사에
게 고유하고 1709년에 창건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일반적인서원의입지조건보다주자학을집대성한주자를
존숭하고강명하고자설립한것이특징이라할수있다. 무릇서원에
제향되려면 학덕을 갖춘 유현(儒賢)이거나 국가에 유공한 충절인 등
성리학적기준에적합해야되는데, 거리가먼인물들이후손향인(鄕
人)들에 의해 대거 제향돼 남설 사태를불러일으키는예가많았는데
회암서원은 배향된 인물이 대부분 덕산현 출신으로 이이, 성혼에서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적통을 계승한 유현이며 아들과 막역
한 교분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회암서원은미사액서원이지만, 다른서원들과마찬가지로사액을
받으려는시도는있었을것이다. 그러나전해오는기록이전혀없으므
로확인할수없으며서원의배치구조또한상세히밝힐수없어추후
연구해야할 과제로 남았다.
창건된뒤선현배향과지방교육의일익을담당하여오던중, 흥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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