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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山의
이흡(李洽)(1549~1608)
취암(醉菴)공은 1549년(명종 4)부터 1608년(광해
즉위)까지 60세를 일기로 사신 선조 때의 명신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이름은 흡(洽)이고 취암은 호이
며 자는 화보(和甫)이다. 여말의 충신이요 성리학의
대가이며 대 문호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의
9대손이고,한양군(韓陽君)흥준(興畯)의아들이다.
재종조 북애공 이증의 문인으로 1573년 (선조 6년)
취암 이흡의 묘 (봉산면 봉림리)
에 생원이 되고, 158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
문원에등용된뒤정언,헌납,장령등요직을두루역임하였다.
1589년10월정여립이역모를꾀한다는고변으로3년여에걸쳐관련된천여명의동인계
가피해를입은이른바기축옥사가일어났다.당쟁시대였던그때크고작은조정의사안들
이정치투쟁의대상이되었는데모반사건이일어났으니조정이얼마나혼란에빠졌을지짐
작하고도 남는다. 이 때 공은 사간원의 헌납이었는데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뜻을 같이
하는사람들과상소를올려소신을피력하였다.그후신묘년봄에장령에임명되었을때공
은아무도하기를꺼려하는적신정인홍에대한탄핵상소를올려조야가모두공을위태롭
게여겼다.이후약20년간파면,파직,사직,삭직삭탈관직1590년(선조23년)영의정송강
(松江) 정철(鄭澈)과 함께 유배로 이어지는 파란 많은 생애를 보냈다. 특히 정인홍의 죄를
항론한 것이 끝내 그의 무리에게 미움을 사게 되어 1601년(선조 34년) 좌참찬 우계(牛溪)
성혼(成渾)과함께6년이란긴세월을유배지옥구에서보내야했다.
공이서거한후1612년(광해군4년)에승정원도승지,이조판서,1630년에는순충보조공신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 춘추관성균관
사 세자이사 아흥군(純忠輔祚功臣 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兼判義禁府事 弘文館 大提學 藝
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世子貳師鵝興君)을추증받았다.
이후호서의많은선비들이‘공의학문과행실의순수함과충효의절의는만인의귀감이되
었으며 따라서 공을 서원에 배향해야 한다.’라고 발론하니 태학의 선비들도 이를 적극 지지
하여1800년3월에덕산의회암서원에배향의자리를마련하였다.그리하여세대의차례를
쫓아야곡(冶谷)조극선(趙克善)의오른쪽에있게된것이다.
또죽음조공희일(竹陰趙公希逸)의뇌문(?文)에‘부자(夫子)께서는기(氣)로화(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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