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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하다. 자는 형백(馨伯) 또는 형중(馨仲)이며 호는 수산(水山)·토정(土亭)이다. 보령 청라에서 태어났는
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지번(之蕃)을 따라 한양에 올라가 형에게 글을 배웠으며 서경덕(徐敬
德)의 문인이 되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종실인 모산수(毛山守) 이정랑(李呈琅)의 딸과 결혼한 뒤 처
가가 있는 충주에서도 살았다. 여러 경전과 사서(史書)를 통달했고 천문·지리·역학·수학·의학·지음
(知音) 등에도 두루 능통했다. 오랜 동안 마포 강변에 흙집을 짓고 청빈하게 살아서 토정(土亭)이라는 호가
붙었다. 개방적이고 진보적 성향을 보였던 그는 당대의 학자인 박순(朴淳)·이이(李珥)·이항복(李恒福)·
성혼(成渾)·조식(曺植) 등과 교유했고 유학에 있어서는 주경궁리(主敬窮理)와 실천이행(實踐履行)을 중시
했지만 주자학에만 얽매이지는 않았다. 독특한 행동과 많은 일화를 남겨 기인(奇人)으로도 일컬어진다.
<이지함 동상>
<이지함 영정>
벼슬에 관심이 없이 지내다가 1573년(선조 6)에 학생(學行)으로 천거되어 청하(포천) 현감이 되어 임진
강의 범람을 예견해서 많은 생명을 구했다. 1578년(선조 11)에 아산현감으로 임명되었다. 부임 후 바로 걸
인청(乞人廳)을 만들고 걸인들을 모아 짚신을 삼고 멍석을 짜고 새끼를 꼬게 하였으며 대장장이 일도 배
우게 하였다고 한다. 생산물은 팔아서 쌀과 베로 바꾸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싼 이자로 빌려 주기도 하는
등 걸인·노약자·빈민의 구호에 힘썼다. 아산향교 터를 새로 잡고 이전을 추진해서 3년 뒤인 1580년에
현재의 자리에 중건되었으며 미륵천의 범람을 예견해서 피해를 줄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러나 아산
현감에 부임한지 1년도 안 되어 재직 중에 병으로 세상을 뜨자 왕이 치제(致祭)의 명을 내렸다. 1713년 이
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배향되었다. 1718년(숙
종 44) 문강(文康)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묘는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문중 묘역에 있다.
[89] 이진행
李震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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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예안(禮安)이며 호는 서봉(西峯)이다. 참봉으로서 정묘호란을 당하여 김령
(金靈)과 함께 의병을 거느리고 적을 토벌하였으며 또한 김령과 더불어 척화상소를 올렸다. 병자호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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