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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쓰시던 옥퉁소 1개, 목포 1개, 포도연과 맹사성의 부인이 쓰시던 옥잠 1개가 전하여 온
다. 또 앞에 은행나무 두주가 쌍으로 서 있고 단으로 둘러 쌓았으므로 행단이라 하는데 맹
정승이 심은 것이라함
찬샘골
(냉정골) - 중리옆에 있는 마을 찬샘이 있음
큰말
(하리) - 중리 아래에 있는 큰 마음
삼선당
- 구괴정 옆에 있는 마을
금곡
서원터 - 금곡서원은 동포 맹희도를 제향하던 사우이다. 1837년 4월 20일 그의 옛집에
서원을 세우고 금곡서원이라 칭하게 되었으나 건립된 이후의 연혁은 알 수 없으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71년에 철폐된 뒤 복원되지 못했다.
구괴정
- 중리에 있는 우주의 느티나무 정자 맹, 허, 황 세 정승이 각기 3주식 심었다 하는
데 현재는 1주만 남았음.
설화산
- 중리 뒷산으로 높이 441Mm로 사화산이다. 온양 아산을 상징하는 산이기도 하다.
들 - 중리마을 앞에 있는 들.
오줌바윗들
- 오붐바위가 있는들, 도로가 생기면서 없어짐.
오줌바위
- 검배 앞에 있는 큰 바위. 바위 셋이 있는데 장수가 오줌을 누어 갈라졌다함.
말바위
- 검배뒤에 있는 바위. 바위 에 굴이 파이었는데 말을 하면 울려 나옴.
쪽두리
바위 - 굴바위 옆에 있는 바위 모양이 족두리와 같은데 1962년에 서울 남산에다 국
회의사당을 짓는다고 바위를 가져갔음.
산방광산
- 검배 남쪽에 있는 광산. 금, 구리, 규석이 나왔는데 해방후에 폐광됨.
설화산
- 설화산(서달산) : 온양장존동, 좌부동과 송악면 외암리와 배방면 중리에 걸쳐서 있
는 산. 높이 441m가 되는 붓끝 같은 봉우리가 솟아 있어서 그 기세가 매우 영특하고 장관
이므로 이 산이 비치는 곳에는 인물이 많이 난다함.
쇠일내
- 배방면 수철리 망경선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흘러 쇠일을 지나 온양 좌부동에
서 온양천으로 들어가는 내
암 - 검배(흑암)
7)
전설
세덕사
온양 금곡서원이 고종 5년에 철폐당한후 현위치 배방면 중리에 이전하여 본사를 건립하였
다. 이곳에 상서공 맹유 동포 맹희도 고불 문정공 맹사성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10월 10일
에 자손과 유림이 모여 제향을 올린다. 그 이름을 세덕사라 정하고 그 자손이 수호관리하고
있다.
치마바위
배방면 중리에 있는 설화산 바로 밑에 치마바위가 넓게 깔려 있어 춘추가절에 화접놀이에
좋고 맑은 물이 흐르기도 하여 한때 즐기기 좋은 장소로 명이 높았다. 이제는 석광으로 개
발되어 채석하여 전의면모를 찾을 길이 없다. 이 치마바위는 치마바위골에 있는 바위로 고
종 광무 2년(1898) 장마에 바위가 나타났는데 그 모양이 치마를 두른 것 같은데 그 사연이
이러하다.
{마을에 가난하게 홀로 사는 총각이 한사람 있었다. 그 총각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나무장
사를 하여 그날그날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그날도 다른때와 마찬가지로 지
게를 짊어지고 산꼭대기를 올라 나무를 하려하는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총각은
나무를 하다말고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 보았다. 거기에는 한여인이 슬프게 울고 있었
다. 총각은 원래 어딘가 모자란 듯 순진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딱하게 울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을수가 없었다. 여인은 미모가 뛰어났고 눈이 너무도 빛
났던 것이다. 여인은 총각에게 이유는 묻지말고 자기를 도와 달라고 애원을 하여 총각은 하
는 수 없이 여인을 집에 데려왔다. 총각의 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초가집에 단칸방 그
리고 부엌이 전부였다. 여인은 집에 오자마자 자기집인냥 팔을 걷어 붙이고 부엌으로 들어
가 그동안 쌓였던 먼지와 그릇을 닦고 집안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총각은 어리둥절 하였지
다. 또 앞에 은행나무 두주가 쌍으로 서 있고 단으로 둘러 쌓았으므로 행단이라 하는데 맹
정승이 심은 것이라함
찬샘골
(냉정골) - 중리옆에 있는 마을 찬샘이 있음
큰말
(하리) - 중리 아래에 있는 큰 마음
삼선당
- 구괴정 옆에 있는 마을
금곡
서원터 - 금곡서원은 동포 맹희도를 제향하던 사우이다. 1837년 4월 20일 그의 옛집에
서원을 세우고 금곡서원이라 칭하게 되었으나 건립된 이후의 연혁은 알 수 없으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71년에 철폐된 뒤 복원되지 못했다.
구괴정
- 중리에 있는 우주의 느티나무 정자 맹, 허, 황 세 정승이 각기 3주식 심었다 하는
데 현재는 1주만 남았음.
설화산
- 중리 뒷산으로 높이 441Mm로 사화산이다. 온양 아산을 상징하는 산이기도 하다.
들 - 중리마을 앞에 있는 들.
오줌바윗들
- 오붐바위가 있는들, 도로가 생기면서 없어짐.
오줌바위
- 검배 앞에 있는 큰 바위. 바위 셋이 있는데 장수가 오줌을 누어 갈라졌다함.
말바위
- 검배뒤에 있는 바위. 바위 에 굴이 파이었는데 말을 하면 울려 나옴.
쪽두리
바위 - 굴바위 옆에 있는 바위 모양이 족두리와 같은데 1962년에 서울 남산에다 국
회의사당을 짓는다고 바위를 가져갔음.
산방광산
- 검배 남쪽에 있는 광산. 금, 구리, 규석이 나왔는데 해방후에 폐광됨.
설화산
- 설화산(서달산) : 온양장존동, 좌부동과 송악면 외암리와 배방면 중리에 걸쳐서 있
는 산. 높이 441m가 되는 붓끝 같은 봉우리가 솟아 있어서 그 기세가 매우 영특하고 장관
이므로 이 산이 비치는 곳에는 인물이 많이 난다함.
쇠일내
- 배방면 수철리 망경선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흘러 쇠일을 지나 온양 좌부동에
서 온양천으로 들어가는 내
암 - 검배(흑암)
7)
전설
세덕사
온양 금곡서원이 고종 5년에 철폐당한후 현위치 배방면 중리에 이전하여 본사를 건립하였
다. 이곳에 상서공 맹유 동포 맹희도 고불 문정공 맹사성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10월 10일
에 자손과 유림이 모여 제향을 올린다. 그 이름을 세덕사라 정하고 그 자손이 수호관리하고
있다.
치마바위
배방면 중리에 있는 설화산 바로 밑에 치마바위가 넓게 깔려 있어 춘추가절에 화접놀이에
좋고 맑은 물이 흐르기도 하여 한때 즐기기 좋은 장소로 명이 높았다. 이제는 석광으로 개
발되어 채석하여 전의면모를 찾을 길이 없다. 이 치마바위는 치마바위골에 있는 바위로 고
종 광무 2년(1898) 장마에 바위가 나타났는데 그 모양이 치마를 두른 것 같은데 그 사연이
이러하다.
{마을에 가난하게 홀로 사는 총각이 한사람 있었다. 그 총각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나무장
사를 하여 그날그날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그날도 다른때와 마찬가지로 지
게를 짊어지고 산꼭대기를 올라 나무를 하려하는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총각은
나무를 하다말고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 보았다. 거기에는 한여인이 슬프게 울고 있었
다. 총각은 원래 어딘가 모자란 듯 순진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딱하게 울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을수가 없었다. 여인은 미모가 뛰어났고 눈이 너무도 빛
났던 것이다. 여인은 총각에게 이유는 묻지말고 자기를 도와 달라고 애원을 하여 총각은 하
는 수 없이 여인을 집에 데려왔다. 총각의 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초가집에 단칸방 그
리고 부엌이 전부였다. 여인은 집에 오자마자 자기집인냥 팔을 걷어 붙이고 부엌으로 들어
가 그동안 쌓였던 먼지와 그릇을 닦고 집안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총각은 어리둥절 하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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