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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를 지냈기 때문에, 사직은 왕조 또는 국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서울과 각 지방에 모두 설
치하는데 좌묘우사의 원칙에 따라 치소의 서쪽에 세우게 된다. 조선시대의 경우, 서울에서는
사직단(현재의 사직공원)에서 1년에 세 번 제사를 지냈는데 중춘, 중추절의 상술일에 두 번
만 지내었다. 나라의 국토와 백성의 무궁을 감싸는 보호신으로 숭앙을 받아온 사직단 제사
는 1908년에 폐지 되었다. 사직단은 가뭄때 기우제를 드렸던 곳이기도 하다. 아산현의 사직
단은 영인초등학교에서 서쪽 300m지점의 서쪽 산등성이에 있었으며, 현재 김남원씨 집부근
으로 터만 남았다.
기우단 : 날씨가 너무 가물면 처음에는 사직단에서, 다음에는 영인산 용샘에서, 그다음은 염
치읍 송곡리에 있던 장지못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한다.
당 집 : 김옥균묘소 남쪽 부근 야산에 당집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당 골 : 아산현에는 옛날 관인된 당골(무당)이 6명 있었으며, 매년 정초에는 가가호호 심방
하며 안택을 무료로 빌어주었으며 그 대신 마을에서는 보리 수확때에 보리 1말, 가을에 벼
1말씩을 거두어 주었다고 한다.
비석 거리 : 학다리 영인면사무소 앞에 있는 큰길에 현감 이지함, 조해, 이정악, 윤정식, 송
미은, 조구호의 선정비들이 나열되어 있다. 원래는 여민루 앞에서 농협앞으로 있었으나 58년
경에 영인면사무소 앞으로 이전하였으며, 이 중 <현감 이지함(
)인화영모비 는
>
1975년
경 성내 1리 저수지 옆에 있던 것을 당시 면장이던 김사철씨가 옮겨왔다고 한다.
아산향교 :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 위치하고 있는 아산향교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향교로서
아산리에 있는 영인면사무소에서 서쪽으로 마을 가운대를 통과하여 약 600m 정도에 위치한
다. 이 향교는 아산리 동쪽 향교골에 있었던 것을 선조 8년(1575년)에 토정 이지함이 아산현
? 했다고 하여 형재에 이르러서도 중국의 사성오현과 사
감으로 있으면서 이곳으로 이
절, 그리고 국내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봄, 가을로 제정을 올리고 있다. 향교의 건물 배치를
살펴보면 입구에 홍실문이 있고 고직사 겸 외삼문이 있으며, 축대위에 명륜당, 제실,대성전
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산향교는 가장 잘 보전되어진 향교의 하나로서 아산의 교육적 열의
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사마소 : 아산향교 아래쪽에 있었으나 오래 전에 폐지되고 옛터만 남아 있다. 연산군 때부
터 지방의 사마, 즉 생원과 진사가 모이기 위해 세운 곳, 아산현의 경우 1701년(숙종27년)에
참판 임홍망과 진사 홍서하, 생원 유득기가 건의하여 창건하였다. 모두 8칸의 건물로서 신ㆍ
구방 사마들이 모여서 상견례를 행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매년 봄, 가을에 유림들이 모여서
서로 강신하고 친목을 도모하였다 한다. 운영을 위해 장의 2명, 서 1명, 고직 1명, 사령 1명
을 두고 밭도 있었으며 세금운반용 배 1척, 보직 20명이 있었다고 한다. 점차 폐해가 심해짐
에 따라 조선 후기(17세기) 인조때 들어 폐지되었다.
근민당 : 아산현 동헌 부근에 있었는데 지현(현감) 송병하가 건축하였다고 한다. 회록의 화
를 만나 소실된후 윤경렬이 중건하고 그이름을 인민당이라 개칭하여 기문을 지어 현판하였
으나, 지금은 옛 모습을 알 수 없다.
구장터 : 학다리에서 양조장을 거쳐 지서까지 장터가 번창하였다.
장 터 : 학다리 부근에 있는 마을이며 아산장이 열렸다고 함. 이것을 기점으로 아산리의 1,
2구의 경계로 삼았다.
학다리 : 영인 초등학교 북쪽내 건너에 있는 마을이며, 마을 앞 내에 나무로 다리를 높게
놓았다고 함.
학교산 : 아산리 학다리 뒤에 있는 산이며 모양이 아름답고 그 밑에 사대부이 많이 살았다
고 함.
구향교골 : 객사터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아산 향교가 있었는데 선조 10년(1577)에 현감
이지함이 현재의 향교자리로 옮기었다고 함.
절 골 : 뒤에 있는 골짜기이며, 전에 동심사가 있었는데 폐지되고 현재는 암자가 존재하고
있음.
돛목고개 : 아산리에서 음봉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고개가 안장또는 돛의 목처럼 생겼고
이 고개에 화상을 모신 신당이 있었는데 영험이 매우 있어서 고려때 몽고군이 침입한 때에
몽고군도 성대히 제사를 지냈다하여 주민들이 계속 치성을 드리며 아들 낳기를 빌었다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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