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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예산학 특강 - 禮山이 낳은 금석학자 秋史 金正喜 재조명
2.북한산비건립연대에대한고증
로 미루어 볼 때, 김정희는 필시 이들의 성과를 수용하여 예비적 지식을 갖추었을 것이다.
게다가, 조선 후기 여항시인(閭巷詩人)인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의 문집을 보면,
그가 순조 9년(1809) 여름에 서사(西寺: 僧伽寺)에서 피서를 하면서 지은 시 가운데 ‘비봉(碑峯)’이
『진흥이비고』에서 보여준 김정희의 고증은 ‘정박(精博)함’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놀라운 점이 한
란 제목의 시에서 “眞興北狩碑, 龜趺?鳥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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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하고, 또 금선암(金仙庵)에서 오서(梧墅) 박영원
두 가지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김정희의 고증 가운데 비의 건립 연대에 관한 것은 그의 학
(朴永元: 1791~1854)에게 지어준 12수의 시 가운데 제3수에서 “眞興北狩蹟, ?遙望碑峯. 老衲忘
자적 성가를 한껏 높인 것이면서 동시에 후학들의 의문을 해소시키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年久, 摩?舊種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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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운한 대목이 있다. 추사 이전에 이미 북한산 비봉의 비가 진흥왕순수비임을
반고(班固)의 『백호통의』를 보면 「봉선(封禪)」과 「순수(巡狩」조가 있다. ‘봉선’은 왕자(王者)가 역성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易姓)하여 천명을 받은 뒤 천지에 제사지내는 큰 의식이다. 봉제(封祭)는 태산(泰山)에 단을 쌓고
조수삼은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으며, 정조 13년(1789)에 연행사 이상
하늘의 공에 보답하는 것이요, 선제(禪祭)는 태산 아래 양보산(梁父山)에 터를 닦아 땅의 은혜에 보
원(李相源)을 따라 연경에 들어간 뒤 전후 6차에 걸쳐 연행하여 당시 청나라의 일류 문인들과 폭넓
답하는 것이다. 원래 높았던 것에 높이를 더하고 넓었던 것에 넓이를 더한다는 의미다. 이 두 제사
게 교유하였다. 김정희·김명희(金命喜: 山泉) 형제, 조만영(趙萬永)·조인영 형제와도 교분이 퍽 깊
에는 ‘각석기호(刻石紀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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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여 비석을 깎아 제왕의 연호를 새겨 넣는 의식이 있다. 이 ‘각석기
었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 김정희 이전에 박식군자(博識君子)들 사이에서는 북한산비의 존재를 알
호’ 행사는 봉제와 선제에서 뿐만 아니라 순수(巡狩) 때에도 있었다. 진시황순수비가 바로 그것이
았던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김정희가 이런 고급 정보를 놓쳤을 리 없다.
다. 진흥왕순수비는 표면적으로는 진시황순수비의 선례를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기실 봉선대전에
이를 볼 때, 북한산비는 김정희가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고 이미 알려진 비의 내용을 ‘ 정’한 것
서의 예를 모방했을 것이라는 측면도 없지 않다.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김정희가 비봉을 유력(遊歷)한 것은 사전에 습득한 예비적 지식을 확인하
북한산 순수비를 세운 연도는 따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모두(冒頭)에 나오는 ‘歲次戊子八月卄
一日癸未, 眞興太王巡狩管境, ?石銘記也’라 한 대목은 연도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황초
는 차원이었으니 다분히 ‘의도적’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조인영의 증언으로도 뒷받침된다.
령비와 마운령비 서두 부분의 내용이 이와 같고, 글자의 결락이 있는 북한산비도 여러 면으로 보아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순수관경(巡狩管境)’과 ‘천석명기(?石銘記)’를 동시에 이루
북한산 남쪽에 승가사가 있다. 그 상봉(上峯)을 비봉이라 한다. 서울 운종가(雲從街)로부터 비스듬
히 북쪽으로 봉우리 꼭대기에 기둥 하나가 보이는데 우뚝하여 마치 사람이 서있는 듯하다. 시속에는
어진 사실로 보아야 하느냐의 여부가 중요하다.
여승(麗僧) 도선(道詵)의 비석으로 전해오는데 지금은 글자가 없다고 한다. 병자년(1816) 가을에 추사
김정희는 생전에 마운령비를 보지 못했다. 또 북한산비는 모두 부분이 결락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김원춘(金元春)이 나에게 “내가 비봉에 올라갔는데 비석에 글자가 남아 있었습니다. 참으로[實] 신라
김정희는 북한산 순수비가 황초령 순수비와 자체(字體)나 글 내용이 같은 것으로 보아 두 비가 동시
진흥왕의 비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미칠 듯이 기뻐하며 그와 함께 찾아가보기로 약
에 새겨지고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것은 조인영의 생각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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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했는데, 다음 해 6월 8일에야 비로소 실천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정희의 문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은 북한산 순수비를 진흥왕 당대
에 세운 것이라는 김정희의 견해에 찬동하지 않았다. 금석과 서화에 조예가 있어 유희해의 『해동금
여기서 ‘ (實)’자는 ‘ 로’, ‘참으로’ ‘확실히’(틀림없이, 분명히, 정말로)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만큼,
석원』에 제사(題辭)를 쓰기도 하였던 그는 “비록 비를 세운 연대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없지만 진
김정희의 현장 답사가 학자들 사이에 전해오는 말을 실지로 확인하기 위한 차원이었다고 판단한다.
흥왕이 순수할 적에 세운 것이 아님은 확실하여 의심이 없다”고 하면서, 뒷날 진지왕이나 진평왕 때
34) 『秋齋集』 권2, 16b, 「己巳長夏, 避暑于西寺, 分安得枕下泉, 去作人間雨, 各賦一物」, (총간 271, 378쪽) 참조. ‘安
得枕下泉, 去作人間雨’는 朱子의 詩句에서 나왔다. 
35) 『秋齋集』 권6, 6a, 「金仙庵贈梧墅十二首」(총간 271, 466쪽) 참조.
37) 『백호통의』, 「封禪」 “刻石紀號者, 著己之功跡也, 以自效倣也.”
36) 『雲石遺稿』 권10, 4a, 「僧伽寺訪碑記」 “北漢之南, 有僧伽寺, 其上峯曰碑峯. 自京師雲從街?北, 見峯顚一柱, 兀然如人
立. 俗傳麗僧道詵碑, 今沒字云. 歲丙子秋, 秋史金元春語余曰: 「吾上碑峯, 碑有殘字, 實新羅眞興王碑也.” 
38) 『완당전집』, 권2, 39a, 「與趙雲石寅永」; 『雲石遺稿』 권10, 4a~5a, 「僧伽寺訪碑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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