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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이정운
李鼎運
<1734(영조 10년) ~ ? >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아산 신창 출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징대(徵大)의 아들이다. 자는 공저(共
著), 호는 오사(五沙)다. 27세 때인 1769년(영조 45)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ㆍ정언ㆍ지
평 등을 지냈다. 47세 되던 1781년(정조 5)에 홍충도 암행 어사로 토호와 관리들의 폐단의 시정하였고
1784년(정조 8)에는 사은사 박명원(朴明源)의 서장관으로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어 승지가 되고
1796년 충청도 관찰사, 이듬해에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되고 1800년(순조 즉위년)에 형조판서(刑曹判書-
정2품)가 되었다. 그가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1796년) 외암 이간의 손자인 예안 이씨 이건주(李建胄)를
학행으로 천거하기도 했다. 글을 잘 써서 명성이 높았고 사후에 정민(貞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86] 이제형
李齊衡
<1605(선조 38년) ~ ? >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성종의 아들인 경명군(景明君) 침( )의 후손이고 창원군
수 세의(世義)의 손자며 전주 이씨 아산(염치 강청리) 입향조인 성균관 장의(掌議) 송파공 생인(生寅,
1586~1616)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상산(商山) 김씨로 좌의정을 지낸 귀영(貴榮)의 딸이며 부인은 창녕 성
(成)씨 진사(進士) 대수(大受)의 딸과 의령 남(南)씨 두명(斗明)의 딸이다. 자는 원옥(元玉), 호는 취수헌(醉
睡軒)이다. 1639년(인조 17)에 알성 문과에 을과 1위로 급제하여 1642년(인조 20)에 지평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정언·문학·장령·헌납 등을 거쳐 사헌부집의(執義-정3품)에 이르렀다. 1654년(효종 5)에는
사은사 구인후(具仁
)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정직(正直)으로 스스로를 지켰
으며 시류(時流)와 더불어 부앙(俯仰)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영광의 장천서원에 아들 단석(端錫)과 함께
추배되었다. 청백으로 이조참판과 제학으로 추증되었다.
[87] 이종덕
李鍾悳
< ? ~ ? >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전주이고 쌍호당(雙壺堂) 단석(端錫)의 후손이다. 자는 회수(晦授)고 호는
창백헌(蒼白軒)이다. 매산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으로 학문과 경술(經述)로 선비들의 추대를 받았으며 전
재 임헌회(任憲晦)와 도의로 교제하였다.
[88] 이지함
李之
<1517(중종 12년) ~ 1578(선조 11년)>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며《토정비결(土亭秘訣)》
의 저자라는 설이 있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고려
말의 학자 목은(牧隱) 색(穡)의 후손으로 현령 치(穉)의 아들이고 북인 영수 영의정 산해(山海)의 숙부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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