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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입 향
신유리에서 가장 발달한 버들과 인추골에는 비교적 인구가 많으며 노인회관 앞의
200
된 정자나무로 보아 이 마을의 형성년대가 서기
1800
년경으로 약
200
년전에 형성된 것으
로 추정된다
. 6.25
전까지 인구가 많았으나 갑작스런 전쟁으로 동네 청 장년층의 인구뿐만
아니라 노약자까지 많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에 피난민들과 본래 이 마을에 살던 사람들
이 모여서 지금 신유리를 형성하였다 한편 처음으로 터를 잡은 성씨는 밀양 박씨이나 현
재는 거의 살고 있지 않다.
6)
지 명
버들
벌말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앵소유지형 의 명당이 있었음
"
"
벌말
도고저수지 남쪽 벌판에 있는 마을
인추골 일출골
일출봉 밑에 새로 형성된 마을
팽나무쟁이
덕암리로 가는 세 갈래 길목에 있는 마을로 팽나무 정자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
부엉매
벌말 남동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부엉이와 같다 하여 부엉매라 함
일출봉
버들 남쪽에 있는 산으로 앵소유지형의 명당이 있다는 곳임
도고저수지
신유리 앞에 있는 저수지로
1929
3
수지를 만듬.
7)
전 설
8)
전통놀이 및 대표적인 집단행사
마을에 큰 불화가 없고 항상 안전을 기하기 위해 정월 보름이면 성황제를 올린다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이장을 중심으로 산에 올라가 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9)
특별하게 소개할만한 인물
열사 이 민학 선생
본관은 덕수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형인 이효신의
11
대손으로
1856
년 철종
7 )
산군 도고면 신유리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강직한 성품과 총명함을 소유했음은 물
론이요 부모님께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여 그 마을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뿐만 아니라 나
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어서 조국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는
언제든지 목숨을 바치겠다는 강한 결의 같은 것이 엿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런 결의는 그
의 평생을 두고 한결 같은 것이었다 후에 장성하여 부인 김씨와 결혼하여 아들 준영과
딸 셋을 두었는데 그의 아들 또한 아버지의 성품을 이어받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였고
용감하였으며 목숨을 아까워 하지 않는 정열 즉 애국심이 그의 가슴속 깊이 새겨 있었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기에 앞서 한 나라의 군인으로써 임무를 충실했다 그러나 그의 아
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보다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07
8
1
이준영 참위가 아깝게도 서울에서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이민학씨는 분노 하였다 그래서
어떻게든 나라의 일에 자신이 나서야 할 때가 왔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였다 그후 일본
헌병대에서는 그 유가족에 대한 감시와 박해가 심해졌으므로 이민학씨는 집을 나와 의병
단체에 가담하였다 아들의 원수 그보다는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의병 활동에 온 힘을 다
쏟았다 그러나 비밀리에 진행되던 의병 활동도 친일파 단체인 일진회 회원중 한사람의
밀고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 민학씨는 이제 자신의 앞일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
을 예감했지만 비굴하게 그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너무나 당당하게 그리고
떳떳하게 그 당시 함께 체포되었던 의병
3
1908
9
10
일 총살 당하였다고 한다 향년
52
세였다
열사 이 준영 선생
이준영씨의 본관은 덕수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장군 충무공의 형인 이요신의
12
대손이다
. 1879 (
년 고종
16 ) 1
9
김해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준영이
14
세가 되었을 때에 천안군 목천면 귓골 박영성씨의
입 향
신유리에서 가장 발달한 버들과 인추골에는 비교적 인구가 많으며 노인회관 앞의
200
된 정자나무로 보아 이 마을의 형성년대가 서기
1800
년경으로 약
200
년전에 형성된 것으
로 추정된다
. 6.25
전까지 인구가 많았으나 갑작스런 전쟁으로 동네 청 장년층의 인구뿐만
아니라 노약자까지 많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에 피난민들과 본래 이 마을에 살던 사람들
이 모여서 지금 신유리를 형성하였다 한편 처음으로 터를 잡은 성씨는 밀양 박씨이나 현
재는 거의 살고 있지 않다.
6)
지 명
버들
벌말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앵소유지형 의 명당이 있었음
"
"
벌말
도고저수지 남쪽 벌판에 있는 마을
인추골 일출골
일출봉 밑에 새로 형성된 마을
팽나무쟁이
덕암리로 가는 세 갈래 길목에 있는 마을로 팽나무 정자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
부엉매
벌말 남동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부엉이와 같다 하여 부엉매라 함
일출봉
버들 남쪽에 있는 산으로 앵소유지형의 명당이 있다는 곳임
도고저수지
신유리 앞에 있는 저수지로
1929
3
수지를 만듬.
7)
전 설
8)
전통놀이 및 대표적인 집단행사
마을에 큰 불화가 없고 항상 안전을 기하기 위해 정월 보름이면 성황제를 올린다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이장을 중심으로 산에 올라가 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9)
특별하게 소개할만한 인물
열사 이 민학 선생
본관은 덕수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형인 이효신의
11
대손으로
1856
년 철종
7 )
산군 도고면 신유리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강직한 성품과 총명함을 소유했음은 물
론이요 부모님께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여 그 마을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뿐만 아니라 나
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어서 조국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는
언제든지 목숨을 바치겠다는 강한 결의 같은 것이 엿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런 결의는 그
의 평생을 두고 한결 같은 것이었다 후에 장성하여 부인 김씨와 결혼하여 아들 준영과
딸 셋을 두었는데 그의 아들 또한 아버지의 성품을 이어받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였고
용감하였으며 목숨을 아까워 하지 않는 정열 즉 애국심이 그의 가슴속 깊이 새겨 있었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기에 앞서 한 나라의 군인으로써 임무를 충실했다 그러나 그의 아
내는 남편에 대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보다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07
8
1
이준영 참위가 아깝게도 서울에서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이민학씨는 분노 하였다 그래서
어떻게든 나라의 일에 자신이 나서야 할 때가 왔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였다 그후 일본
헌병대에서는 그 유가족에 대한 감시와 박해가 심해졌으므로 이민학씨는 집을 나와 의병
단체에 가담하였다 아들의 원수 그보다는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의병 활동에 온 힘을 다
쏟았다 그러나 비밀리에 진행되던 의병 활동도 친일파 단체인 일진회 회원중 한사람의
밀고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 민학씨는 이제 자신의 앞일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
을 예감했지만 비굴하게 그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너무나 당당하게 그리고
떳떳하게 그 당시 함께 체포되었던 의병
3
1908
9
10
일 총살 당하였다고 한다 향년
52
세였다
열사 이 준영 선생
이준영씨의 본관은 덕수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장군 충무공의 형인 이요신의
12
대손이다
. 1879 (
년 고종
16 ) 1
9
김해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준영이
14
세가 되었을 때에 천안군 목천면 귓골 박영성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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