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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의 내용은 사실과 다르며 신진사림과 뜻을 함께 하여 벼
슬을 버리고 은거하는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
해 정(貞)도 실직이 아닌 병절교위(秉節校尉-종6품 무관품
계)로 임명만 되었을 뿐 나아가지 않았고 일찌감치 벼슬에 뜻
을 접었다. 가정 형편도 어려워서 1553년(명종8-추정)경에 처
가(妻家)가 있는 아산 백암리(뱀밭)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그는 비록 벼슬이나 공적에서 크게 드러나는 일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큰 뜻을 품었기에 네 아들의 이름을 중국의 삼황오
<이정 내외의 묘>
제(三皇五帝)와 하(夏)나라 왕의 이름을 써서 지었으니 희신
(羲臣)·요신(堯臣)·순신(舜臣)·우신(禹臣)이었다. 희신과 요신은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떴으나 이들 대
(代)에 참판공파(희신), 율리공파(요신), 충무공파(순신)로 나뉜다. 그의 후손들은 나라를 위해 큰 공을 많
이 세웠다. 그는 순신이 함경도에서 군관으로 근무하던 1583년 11월에 향년 73세로 졸하였고 사후에 아
들 순신의 공적으로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補祚功臣)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덕연부원군
(德淵府院君)에 봉해졌다. 묘는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충무공 순신의 묘 서쪽 능선에 있는 덕수 이씨 묘역
에 있다.
[84] 이정렬
李貞烈
<1868(고종 5년) ~ 1950>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예안이다. 유현(儒賢)
외암 간(柬)의 후손으로 충북 보은 외속리면에서 태어
났다. 생부는 철인(哲仁)인데 10세 때 통덕랑 상규(相
逵)의 계자가 되었고 주로 서울에서 살았다. 자는 군서
(君瑞), 호는 퇴호(退湖)다. 그의 할머니가 명성황후의
이모였기 때문에 명성황후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1891년(고종 28)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비서원승,봉상
사부제조 등을 역임했다. 이후 태복사·시강원·상의
사·봉상사의 여러 직책을 거쳐 규장각 직학사에 임명
되었다. 이어서 시종원 부경, 1905년(고종42-광무9)
<참판댁에 있는 퇴호거사 현판>
9월 궁내부 특진관을 거쳐 1906년(고종43-광무10)에
다시 봉상사 제조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자 고종 황제가‘퇴호거사’
라는 호를 내렸으며 영왕(英王-영친왕)이‘일심사군(一
心事君)’
, ‘퇴호거사(退湖居士)’
라는 글씨를 써 주었다고 한다. 그 후 송악에 와서 머물렀고 칠은계(七隱
契)를 조직하기도 했다. 은퇴 후에 황실에서 하사받아 지은 집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참판댁’
이라 한
다. 많은 유품을 남겼으며 묘는 아산시 송악면 역촌 2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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