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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동 설화 15
충무공 산소 유래
충무공 산소를 여기서 한 십리 가량되는 저 설화산이 있어요 설화산 꼭대기다 잡았어요
중국에 부사춘이라는 분이요 부사춘이라고 이름이 그분이 설화산 꼭대기에 그래 거기다
선산을 모실라고 인제 자기가 생시에도 해전을 하느라고 일평생을 팔년풍진을 지키느라고
해변에 가서 지냈는데 시방 죽어서 말이지까지 이런 산말랭이니께 이런덴 씰 수가 없다
구 그래 그러냐구 게 요기서 온양읍내가 있에요 온양 읍내와서 뒷산에 와서 잡았대요 온
양 읍내 뒷산을 잡으니께 그 때는 모이를 쓰면 그 밑에 관사를 전부헐어야 돼 그러니께 이
민폐가 많아서 안되겠다구말여 헐 수 없이 음봉면 사 삼거리 그 안에 그게 무슨 동네
소꼴 앞에다 산소를 잡었에요 충무공 산소를 게 거기다 모셨다 그 얘기요 부사춘이 죽은
뒤에 백칠십년 후에 박상이라는 저 명사가 났에요 게 그 모이를 씨구서 삼대를 청춘과부만
나는게야 아들두 못낳구 그래서 집이 재변이 났다 해가주구는 그 박상이가 명사라구 하니
까 디려다 봤다 그 말야 그래 박상이가 보니까 못씨겠거던 그래 파묘를 해야 된다구 그래
구서 시방 모신데 그 자리다 파묘를 할라구 자리를 잡구 광중을 짓구 모두 이러구 그 모이
를 파보니께 거기다 뭐야 석편을 묻었다 그게요
. ‘
요마 박상이 차묘천장이라 백칠십년 뒤
에 요망한 박상이가 나가주구서 이 묘를 옮기리라구 썼더래요 묻었더래요 백칠십 년 뒤에
박상이가 나서 욍길 줄까지 알었더래요 그래서 시방 박상이 소점으루 시방 모신데두 삼거
리 그 위예요 거기다 갖다 모셨에요 구연자
조중렬
온천동 설화 16
임금이 왕림할 자리
정조대왕께서 그 사도세자라는 분이 영조의 아들이 정조의 아들이지 사도세자가
청중
아 사도세자가 영조의 아들이지 정조가 사도세자의 아들이여
그 억울하게 두주에다 넣고
서 풀로 푹 덮어서 사도세자가 그렇게 죽었다구 정조가 그 사도세자의 아들이니께 그래
인저 등극을 한뒤에 하도 그 자기 아버지가 원통하게 죽어서 그 능이 수원에 계시거든 사
도세자의 능이 그런께 매일 뭐 한달에 청취 불능
스물아홉번씩 매일 댕기는 거여 자기
선산에 댕기느라고 그 당시에 미행으로두 말이여 너무 번잡하면 그냥 걸어서 온단 말이여
그러다가 그 수원을 걸어서 한번 오다가 오니께 어떤 사람이 모이를 어떤 아이가 어떤 사람
이 모이를 쓴단 말이야 그랬는데 못쓸 땅에다 쓴단 말이야 못쓸 땅에다
. “
그래 왜 여기다
쓰느냐
그 말이여
, “
다른 데다 쓰라
고 하니께
, “
아 다른데다 옮길 수도 없구 이렇다
말이여
, “
이런데 어떻게 할 수가 있느냐
구 말이여
. “
그래 이 모이자리를 누가 잡았느냐
고 하니께 말이여
. “
저기 저 거시기
……
꼭같은 전준 이가여
. “
저 이생원이란 분이 잡아
줬다
그 말이여
. “
원 이런 소행이 꽤씸한 놈이 있나 어디 사느냐
고 물은께 그 근처 어
디 산다고 그런다 그래 인제 거기를 가셨다는 게여 인제 정조대왕이 그래서 거기를 가서
보니께 짚세기를 삼구 있구 아주 다찌그러져 가는
아 얘기를 잘못했네
그래서
, “
어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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