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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예산학 특강 - 禮山이 낳은 금석학자 秋史 金正喜 재조명
육당 최남선은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 보이는 다음 내용
도 밝힌 바 있다.
역시 황초령비의 존재를 언급한 것으로 보았다.
22)
…… ‘管’자 아래는 희미하지만 ‘境’자이니, 묶어 합치면 ‘진흥태왕순수관경(眞興太王巡狩管境)’ 여덟
글자가 되는군요. 이 예는 이미 함흥 초방원 북순비에서 보았었습니다. 그리고 제7행의 ‘도인(道人)’ 두
선춘령(宣春嶺: 先春嶺)은 갑산(甲山)과 닷새 길 거리에 있다. 백두산 밑에 가깝다. 짤막한 비가 풀
27)
글자는 초방원 북순비의 ‘시수가사문도인(時隨駕沙門道人)’이란 말과 착오 없이 딱 들어맞습니다.
가운데 묻혀 있었는데, 신입(申砬) 공이 남병사(南兵使)가 되었을 때에 탁본을 해와서 나도 볼 수 있었
다. 높이는 다섯 자쯤이고 넓이는 두 자쯤이며 글자는 필진도(筆陣圖)와 비슷하다. 작고 태반이 뭉그
러졌다. 여기서 말한 ‘황제’는 고구려 임금이다. 또 ‘탁부(啄部: 喙部?) 아무개 6·7명’이라고 했는데, 나
한편, 김정희의 선배 학인으로 금석학에 조예가 있었던 유본학(柳本學: 1770~?)
28)
같은 이가 『문
는 탁부가 어떤 관직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 뒤 하곡(荷谷) 허봉(許?)이 “일찍이 고사(古史)를 보니 탁
암록(問菴錄)』(原題는 ‘問菴金石錄’인 듯)에서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僧伽寺碑)의 존재를 이미 밝
23)
부는 지금의 대부와 같다”고 하였다.
혔다는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29)
유본학이 북한산 순수비를 현장 답사한 시기가 언제였는
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34세 때인 순조 3년(1803) 봄, 우울하던 차에 마침 과거에 낙방한 한치
그러나, 위에 소개된 비석은 고려시대 윤관(尹瓘) 장군이 선춘령에 세운 고려정계비(高麗定界碑)
윤(韓致奫: 1765~1814)
30)
등과 함께 서대문 외성(外城)으로부터 육각봉(六角峯)까지 두루 유람하였
일 가능성이 높다.
24)
황초령비에는 ‘황제’란 말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글씨도 왕희지가 쓴 위부
던 사실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할 수는 있을 듯하다.
31)
인(衛夫人)의 「필진도」
25)
와는 다르다.
김정희는 유본학과 가깝게 교유하였다. 1812년~1813년에는 유본학의 시문집을 3차에 걸쳐 열독
이렇듯 김정희에 의해 북한산 순수비가 연구되기 이전에 이미 황초령 순수비의 존재가 세상에 널
또한 유본학을 통해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와 금석학에서 선구적 업적을 남겼던 영재(?齋
하였다.
32)
리 알려졌고, 그 탁본이 방간(坊間)에 유포되어 학자들이 참고하였다.
26)
김정희는 황초령 순수비를
)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의 학문적 성과를 수용할 수 있었다.
33)
유본학은 유득공의 아들이다.
실제 보지는 못했지만 일찍부터 탁본을 입수하여 참고하였을 것이다. 이 황초령비의 탁본이 전해오
당시 『문암록』 같은 자료가 선비 사회에 나돌아 『임원십육지』의 저자 서유구(徐有?: 1764~1845)가
지 않았다면, 북한산 순수비를 그처럼 정밀하게 판독, 심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김정희가 북한
인용, 소개하였음은 지나쳐 볼 일이 아니다. 더욱이 김정희가 유득공·유본학 부자와 절친했던 점으
산비를 심정하게 된 데에는 『삼국사기』 진흥왕 16년(555) 겨울 10월조에 이른바 “북한산에 순행(巡
幸)하여 영토를 넓혀 정했다”는 기록에서 상당한 시사(示唆)를 받았을 것이고, 황초령비의 내용이
더욱 확실한 뒷받침이 되었을 것이다. 김정희가 『진흥이비고』라는 글을 써서 황초령비와 북한산비를
27) 『완당전집』 권2, 38a~38b, 「與趙雲石 寅永」
함께 대조하고 고증한 것은, 황초령비가 북한산비를 판독, 고증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
28) 자는 伯敎(景敎). 유득공의 맏아들로 시에 뛰어나 紫霞 申緯와 교류가 많았다(신위는 김정희와도 매우 긴밀한 관계였
임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실은 『진흥이비고』에서 분명히 증명하였고, 또 조인영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 금석 및 서화에 정통하였으며, 저술로 『問菴文藁』 상·하책(필사본, 개인소장), 『문암집』 1책(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이 있다. 벼슬은 檢書官·음죽현감·연천현감 등을 지냈다. 본학의 아우 本藝(1777~1842)는 자는 季行, 호는 樹軒으로
『宮殿誌』·『漢京識略』·『樹軒訪碑錄』(樹軒金石錄) 등을 남겼다.  
29) 『林園十六志』 怡雲志 권5, , 附東國金石 “[眞興王北巡碑] 問菴錄: 碑峯在都城彰義門外, 有新羅眞興王北巡
碑. 字皆漫滅, 有餘十餘字可辨.”(민속원 영인본 제5권, 2005, 364쪽)  
30) 『海東繹史』의 저자다. 그가 본편 70권을 완성하고 세상을 떠나자 조카이자 문인인 鎭書가 뒤를 이어 속편 15권을 증보
22) 최남선, 「신라 진흥왕의 在來 三碑와 新出現의 磨雲嶺碑」, 『靑丘學叢』 2, 1930; 『육당 최남선 전집』 2, 현암사, 1973,
하여, 순조 23년(1823) 모두 85권으로 완성하였다. 『해동역사』, 속권 7, 「지리고(七)」에서는 “진서가 삼가 살피건대 ……
534쪽 참조. 
북한산은 지금의 삼각산으로 삼각산 승가사 -경성에서 북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북쪽 산봉우리 위에 진흥왕순
23) 『대동야승』 권5, 『五山說林草藁』 “宣春嶺, 去甲山五日程, 近白頭山下. 有短碑隱草中. 申公砬爲南(北?)兵使, 打而來. 余
수비가 있다. 비문은 모두 12행인데 마멸되어서 판독할 수가 없다. 판독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제1행에는 ‘眞興太王及衆
得見之, 高僅五尺, 廣二尺許, 字如筆陣圖而小, 太半欽落. 其曰皇帝者, 高句麗王也. 有曰啄部某者六七人, 余不解啄部爲
臣等巡狩時記’란 것이 있고, 제8행에는 ‘南川軍主’라는 것이 있다. 세운 날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생각건대 진흥왕 16
何官. 其後許荷谷, 對曰, 曾見古史, 啄部猶今之大夫也云.” 
년에 강역을 획정할 때 세운 것이다. 이곳이 고구려와 국경을 나눈 곳이다”고 하였다. 이 내용은 유본학과 한치윤의 관
계를 고려할 때 유본학의 설을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24)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慶源都護府條에서는 “巨陽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先春峴이니, 곧 윤관이 비
석을 세운 곳이다. 그 비의 4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으나, 胡人이 그 글자를 깎아버렸다. 뒤에 사람들이 그 밑을 팠더니
31) 김영진, 「유득공의 생애와 교유, 연보」, 『대동한문학』 27, 대동한문학회, 2007 참조.
‘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고 하였다.  
32) 김영진, 「유득공의 생애와 교유, 연보」 참조. 자하 신위 역시 유본학의 『문암집』을 읽고 두 수의 시를 남긴 바 있다. 『警
25) 방간에 전하는 이 필첩은 東晋 永和 12년(356) 4월에 왕희지가 쓴 것이다. 楷書의 典範이다. 
修堂全藁』 冊七, 「題柳檢書本學問菴集後」(총간 291, 150~151쪽) 참조. 
26) 『大東金石帖』에 보이듯이 일찍부터 탁본이 坊間에 나돌았던 모양이다. 『이계집』 권16, 「題新羅眞興王北巡碑」(총간 241,
33) 박철상, 「조선 금석학사에서 유득공의 위상」, 위의 논문 참조. 박씨는 이 논문에서 “유득공은 추사 김정희 이전의 금석
290쪽), 『?齋集』 권5, 23b~24a, 「新羅眞興王北巡碑」(총간 260, 89쪽), 『硏經齋集』 외집 권61, 蘭香譚叢, 「眞興北巡
학자 중 가장 뛰어난 학자였고 추사 김정희의 금석문 연구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이제 우리는 ‘추사 김정
碑」(총간 278, 121쪽) 참조. 
희의 금석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금석학자’로서 유득공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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