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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예산학 특강 - 禮山이 낳은 금석학자 秋史 金正喜 재조명
(『완당집』은) 『담연재시고(覃?齋詩藁)』에 비해 수록된 시의 수가 줄었고, 『완당척독(阮堂尺牘)』에 비
伽寺)에 갔다가 이에 이 비를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
해 수록된 척독의 수도 줄었다. 반면에 문편은 대폭 증가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문편이 증가한 이유는
았다. 손으로 문지르자 자형(字形)이 있는 듯하여 본디 절로 이지러진 흔적만은 아니었다. …… 탁본을
새롭게 발굴된 문편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이 아니라, 편지에 적당한 제목을 붙여 문편으로 편입했기
한 결과 비신은 황초령비와 서로 흡사하였다. 제1행 진흥(眞興)의 ‘진(眞)’자는 약간 민멸되었으나 여러
때문이었다. 이는 『완당집』의 편자들이 지나치게 추사의 문편을 늘리는 데만 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상
차례 탁본을 해서 보니, ‘진’자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황이 그렇다보니 추사가 써놓은 글만 있으면 모두 가져다가 문집에 편입시켰고, 결국 청대 문사들의 글
보니, 1천 2백 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하루아침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
을 추사의 글로 잘못 집어넣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북학의 종장인 추사의 문집답게 문편을
파(辨破)되었다. 금석학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 (『진흥이비고』)
15)
늘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빚어낸 웃지 못할 오류들이다.
김정희는 이에 앞서 연행(燕行)을 통해 옹방강·완원(阮元) 등 청나라 학자들로부터 고증학의 정
이상의 여러가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금석과안록’이라는 제명(題名)을 처음 붙이고 이를 단행본
수(精髓)인 경학과 서법을 비롯한 학문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당시 독립적인 학
형식으로 엮은 사람은 『완당집』의 편집자 민규호 등일 가능성이 높다. 시문 중심의 『완당집』에 그 글을
문 분야로 새롭게 발전하던 금석학에 대해서는 ‘개안(開眼)’에 가까운 충격과 영향을 받고 돌아왔
실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남두는 “『전집』의 ‘진흥이비고’는 전집의 편집자가 문편(文篇)의 성
다. 귀국한 뒤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고 금석 자료의 수집과 보호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격으로 ‘고(攷)’편에 편입시킬 때 붙인 제3의 명칭으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16)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결과 북한산 순수비를 사실상 ‘재발견’하는 개가(凱歌)와 함께 『진흥이비고』 같은 수준 높은 업적을
이와 정반대다. 김정희의 금석 관계 두 저술의 이름이 ‘비고(碑攷)’였음은 위에서 말하였다. 이를 미
남겼던 것이다. 종래 4백여 년을 두고 막연하게 무학대사의 비라고 전해 오던 것이 마침내 김정희의
루어 본다면 김정희의 문인들에 의해 ‘금석과안록’이라는 명칭으로 전해오던 것을 1934년 『전집』을
형안(炯眼)에 의해 역사적 확증을 얻게 되었다. 이는 금석학사뿐만 아니라 사학사(史學史)에 특필
편찬할 때 본래 이름인 ‘진흥이비고’로 환원시켜, 명실이 괴리된 것을 바로잡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할 일이라 하겠다.
1. 북한산비와 김정희의 예비적 지식
Ⅲ.북한산순수비와관련된두가지문제
진흥왕순수비의 존재는 김정희가 처음으로 밝힌 것은 아니다. 지리학자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이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에서 “함흥의 황초령과 단천(端川)에 순수비가 있으니
금석학과 관련한 김정희의 업적 가운데 일대장거(一大壯擧)는 역시 순조 16년(1816) 7월, 북한산
……”
19)
운운하여 진흥왕순수비의 존재를 밝힌 바 있다. 영조 46년(1770)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비봉(碑峯)에 있던 진흥왕순수비를 현장 답사하고 비문을 판독, 고증한 일이라 할 수 있다.
17)
에서도 “진흥왕 순수 정계비(定界碑)는 함흥부 북쪽 초방원(草坊院)에 있는데, 비문에 대강 말하기
를 ……”라 하였고, 또 같은 책에서 『해동집고록(海東集古錄)』
20)
을 인용하여 “비문은 12줄이며 줄마
이 비는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 무학(無學)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
다 35자로 전체 420자인데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겨우 278자다”라고 한 바 있다.
21)
18)
碑]
라고 잘못 일컬어져 왔다. 그런데 가경(嘉慶) 병자년 가을에 내가 김경연(東籬)과 함께 승가사(僧
15) 박철상, 「秋史 金正喜의 저작 현황 및 시문집 編刊에 대하여」, 『대동한문학』 25, 대동한문학회, 2007, 30쪽.
16) 김남두, 위의 논문, 47쪽.  
17) 『완당전집』 권1, 5a~18a, 「眞興二碑攷」; 진흥왕순수비(북한산비)를 찾아 내용을 심정한 경위에 대해서는 조인영의 『雲
石遺稿』 권10, 4a~5a, 「僧伽寺訪碑記」(문집총간 299, 191쪽)에 보인다. 김정희와 조인영의 학문적 교유 관계, 특히 금
19) 『동국지리지』 單卷, 22b, 삼국 고구려, 封疆, “咸興黃草嶺及端川, 亦有巡狩碑, 則東沃沮, 亦有時爲新羅所奪
석학과 관련한 교유 관계는 세상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그들 양인의 문집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김정희야 생전에 자
有矣.”(『久菴遺稿, 東國地理誌』, 일조각 영인, 1987, 219쪽)
신의 저술 일부를 두 차례나 불에 태워 없앤 적이 있기 때문에 관련 자료가 零星하다고 하겠지만, 조인영의 문집에 김정
희와 주고받은 편지글 하나 없는 것은 의외다. 이런 의미에서 조인영의 「僧伽寺訪碑記」 1편은 값지다고 할 것이다.  
20) 대개 편저자 미상으로 알려져 왔으나, 김정희의 『海東藝文攷』에는 朗原君 李?의 편저라 되어 있다. 박철상, 「조선 금석
학사에서 柳得恭의 위상」, 『대동한문학』 27, 대동한문학회, 2007 참조. 
18) 李重煥, 『擇里志』 八道總論, “及我朝受禪, 使僧無學定都邑之地. 無學自白雲臺尋脈, 到萬景西南, 行至碑峯, 見
一石碑大刻, 有無學誤尋到此六字. 卽道詵所立也.” 
21) 『국역 증보문헌비고』 輿地考(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8, 101~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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