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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규수는 외아들 유제(有濟)만을 두었고 서유제가 두 아들 근보(根輔)와 식보(植輔)를 낳았으며 그
들이 1남과 3남을 두면서 점차 후손이 늘게 되었다. 후손은 현재 거산리 일대를 중심으로 온양, 천
안, 공주 지역에 살고 있다.
[53] 창녕성씨 성준
| 成準
<1554년(명종9년)~1619년(광해군11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창녕성씨(昌寧成氏) 13세(世)로 상곡공파(桑谷公派) 아산시 지역, 인주면 대
음리 입향조이다. 선대는 서울과 용인 등 경기도 일대에 거주하였다. 현재 배방 중리에 거주하는 16
세 성기만(成基萬, 88세)씨의 13대조이다.
성준은 파조인 판서 상곡 성석연(成石
, 뒤에 石因)의 7세손이다. 고조는 생원 성적(成迪)이고 증
조는 무과 급제 후 군수를 지낸 성세공(成世功)이며 조부는 진사 성봉(成鳳)이다. 아버지 성덕원(成德
元)은 승훈랑에 오르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서흥김씨(瑞興金氏)이며 감찰 김윤장(金允章)의
딸이다.
그의 자는 사칙(士則)이고 호는 삼송(三松)이다. 고부군수 등을 역임하였고 청백하다는 평이 널리
알려졌다. 왜란 때 광해군을 이천(利川)에서 호종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어머니 서흥김씨가
광해군의 이모였으나 성준(成準)은 시사(時事)를 우탄(優歎)하여 권요(權要)에 굴하지 않았다’
는 기록
으로 벼슬이나 권력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대에 이미 문학과 필법으로 이름이 있
었고 한강(寒崗) 정구(鄭逑,1543~1620),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고 예의를 논하였다.
그가 언제 왜 인주로 내려왔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아산현 하도(下道-인주면 대음리)에 은거하고
이때 방축리(인주면 문방리)에 압해정(壓海亭)을 짓고 거문고와 술로써 즐겼으며 당시의 문사(文士)
들이 시를 지어 그의 아름다움을 흠모하였다.’
는 기록과 그가 고부군수가 된 것이 죽기 전해인 1618
년인 점으로 보아 말년에 내려온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처가 쪽은 확인되지 않는다. 임진왜란과
연계하여 대략 400년 전일 것으로 추정해본다. 그의 묘는 서울 북악산 자락에 있었는데 약20년 전에
인주면 문방리로 옮겨 모셨다.
성준은 취성(就聖), 취현(就賢), 취학(就學), 취문(就問)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취성은 임피현령,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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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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