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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이옹
李邕
< ? ~ ? >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아산(牙山) 이(李)씨의 실질적 1세조이자 아산 지역 입향조이다. 아산 이씨는 경주
(慶州) 이씨에서 갈라져 나온 성씨로, 고려 전기에 형부상서(刑部尙書)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를 지낸 이
주좌(李周佐)를 시조(始祖)로, 고려 중기 이서(李舒)를 중시조로 한다. 서(舒)는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
國)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아주백(牙州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아산을 본관으로 하였다.
묘소가 음봉면 신수리에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아산에 거주하지는 않았고 서(舒) 이후의 세계가 불명확하
기 때문에 그의 후손인 옹(邕)을 실질적인 1세조로 한다. 최근의 족보에는 서(舒) - 병부상서 양중(養中)
- 좌복야 윤중(允重) - 옹(邕)으로 이어지는 세계를 정리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서(舒)의 증손이 된다.
그는 고려 말 공민왕 때에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올랐던 인물로서 이성계 일파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뒤 그를 좌의정으로 제수하고 세 차례나 불렀지만 모두 거절하고 아산의 석교(石橋-현재
의 아산시 둔포면 석곡리)에 내려와 은거했다. 그 후 소영(嘯
-시가를 읊조림)과 어조(漁釣-낚시질)로
자적하며 지냈기에 그의 자호(自號)인 조은(釣隱)은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본조를 섬기어 관은 좌의정
에 이르렀다.’
는 기록은 일방적으로 제수한 것을 기준으로 적은 것이다. 그의 손자 원생(原生)은 홍문관
(弘文館) 정자(正字)를 지냈으며 원생의 손자 석번(碩蕃)이 중종 조의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어 아성군
(牙城君)에 봉해지고 공조판서를 역임하기는 했지만 고려 왕조에서 번성했던 아산 이씨가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못했다.
부인은 김해 김씨 극열(克悅)의 딸이다. 묘는 경기도 양주 망우리에 있었으나 실전(失傳)되었고 경기도
포천 가산면에 단(壇)을 세워 제사하고 있다.
[77] 이요신
李堯臣
<1542(중종 37년) ~ ?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병조참의
거( )의 증손자이고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 백록(百祿)의
손자이다. 아버지 병절교위(秉節校尉) 정(貞)과 어머니 초계
(草溪) 변(卞)씨 현감 수림(守林)의 딸 사이의 4남 중 2남으
로 충무공 순신(舜臣)의 형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뒤에 아버지를 따라 아산 백암리로 이주했다. 자는 여흠(汝
欽)이고 호는 율리(栗里)이다. 퇴계(退溪) 이황의 문인이다.
뜻이 돈독하고 학문에 힘쓰며 자기 자신에 대한 계율을 매
우 엄격하게 하였다. 1573년(선조 6)에 식년 사마시에 합격
하여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퇴계 이황이 주자의 백록동부
(白鹿洞賦)를 써 주면서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묘는 아산시
<이요신의 묘비>
음봉면 삼거리 덕수 이씨 문중 묘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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