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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잊혀진시간을말하다3
킨다고 1957년에 4-H를 만들었다. 그 덕에 새마을 운동과 현대적인 새 시대의 운동에 중
심이되어지역사회가빨리깼다.
그런 움직임에 이어 임동걸은 1960년에 ‘새마을학원’을 운영했다. 평택임씨 모임인 산천
재 종회에서 옛날 ‘상록수’처럼 야학을 시작한 것이다. 임씨 재실인 ‘산천재’ 강당에서 1968
년까지 운영하였는데 학생이고 선생이고 열심히 했다. 문해 과정을 포함해서 중등·양재·
한복 과정 등 300여 명이 수료했으며, 그들 중에는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산천재강당’은교육사업의발원지이며화성주민들을깨우는데많은공헌을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임동일 씨도 야학 선생으로 자원봉사를 하며 국어를 가르쳤다. 교육사
업이 계속 이어지니 기덕리와 화암리의 큰길은 사람들이 그칠 줄을 몰랐고, 100여 명씩 학
생이있었다.
서당도 많이 있었다. 임동일 씨의 증조부이신 임용주가 운영하던 ‘송암사당’은 한말(대한
제국의 마지막 시기)부터 일제 강점기 말까지 있었고, 임호주의 꼬챙이 서당, 덕명서당(임풍우),
화창 서원과 용당리에 이병순 서당이 있었다. 서당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다
녔고,재계와제문등집안을지키는여러가지의식때문에서당을다닌사람들이많았다.
해방은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에 맞아 잘 모르겠다. 6·25도 어린 나이에 겪어 잘 생
각은나지않지만,한국전쟁의여파는많이남았다.공산주의와민주주의사상의혼란이결
국은 지방의 분파적인 색깔을 만들었고, 아직도 해소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가끔 받는다.
6·25당시좌·우익사건은빈부의격차로인한응어리가아닌가하는생각이든다.
기억에 남는 스승은 고등학교 때 담임을 맡으셨던 김병용 선생이다. 원래는 경찰전문학
교를 나와 경찰공무원이었는데 후에 충남대학교를 나와 교직 생활을 하셨다. 이북이 고향
으로,선생의절도있는철저한생활이인생의교훈이되었으며많은영향을받았다.
소명과바람
임동일 씨는 남양초등학교에서 첫 교편을 잡았다. 남양초 2년, 광천상고 1년, 대천여고
10년, 여상 5년, 대천수고를 거쳐 대천고등학교에서 10년을 가르치다 정년을 맞았다. 학생
들 가르치는 일 말고는 열심히 한 것이 없다. 헐렁헐렁 세월을 보내며, 그냥 지낸 것이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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