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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군서당의운영과교육전반
의장 주도자 큰 할아버지 임풍호(林豊鎬)는 집안의 종무 이장으로, 항일 자금이 필요했을 때
소90마리값을냈으며,개인적으로한것이더많았다고한다.
아버지 임승만은 할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계시므로, 집안을 지키고 관리하며 농사를 지
었다. 농사 채를 관리하면서도 현대사회에 일찍 눈이 깨 정미소를 하였고, 대전도매시장에
서양품점을하였다.물질적으로부족함이없었으며,가장번성했을때는천석의곡식을거
두어들였다.그로인해임동일씨는신식학교에다니며공부할수있었다.
어머니이정순(李貞順)은본관이경주이며,비봉강정리가고향이다.외가는한의를전통으
로 이어온 집안이며, 외증조할아버지 이관희는 공주사범학교 교장이었다. 외가 쪽 집안은
교육계에서많은활동을하였다.
임동일 씨는 청양군 화성면 화암리 222번지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화암초등학교와 홍성중학교, 광천상고를 다녔으며, 충남대학교 국문학과 4회 졸업생이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재능이 있어 광천상고 때 응원가가 당선돼 대사전을 상품으로 받기도
했다. 글하고는 인연이 끊어지지 않고, 취미로 이어왔다. 청양문화원 발행 ‘칠갑 문화’에도
몇년전까지는글을실었다.
임동일씨에게는그림을그리는아들과서울연구원설계실장으로일하고있는아들이있
다. 사랑채 대청마루에는 ‘경(敬)’사자가 기둥에 걸려있다. 경은 퇴계의 사상에서부터 나오
는 것으로, 큰아들이 퇴계 선생을 좋아해서 붙여놓은 것이며 경에 관한 책을 자주 본다. 최
익현의글씨다.
화성의중심마을이며독립운동의고장
임동일 씨가 뿌리내린 이곳 화암리·기덕리·수정리 3동은 임가들의 활동 지역이었고 화
성의 중심지였다. 1905년 홍주 의병등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홍주의병은 임한주
선생과 안병찬 선생이 주도하였다. 뒷산과 매봉재, 와정봉은 옛날 독립운동 거점지로 봉화
를올리고끝없는독립항쟁이있었던곳이다.
화암리뿐만아니라이지역민들의인성은저항적이지만진취적인성격이많다.물안이마
을에 사는 삼종아우 임동걸은 충분히 밖으로 나가 살 경제적인 여유가 있음에도 시골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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