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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학생 수도 점점 늘어났다. 반면에 소리 없이 사라진 학교도 있다. 이제는 그 이름마

남,
저 기억이 가물가물한 계명중학교와 동광재건학교이다. 강 선생님은 정식 교사로 발령받


기전6개월정도근무했던동광재건학교와두마면에서는유일한중학교이자신도안에있


었던자신의모교인사립계명중학교에대한설명을이어갔다.


계명(鷄鳴)중학교는 새벽에 닭이 울면 만물이 깨어나듯 세상을 깨우는 인재육성의 뜻


을담고있다.당시신도국민학교뒤에있는불사(佛舍)두채를개조해1954년문교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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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를받은사립중학교로시골마을아이들에게교육의기회를평등하게제공하기위해개
교했다.당시두마면에서는초등학교를졸업하면대개는논산에있는연산중학교나원정
리에있는기성중학교로진학했다.입학시험제도가있던시절이라공부를잘하는학생은
대전에있는중학교로도진학했다.계명중학교는객지로나갈형편이여의치않거나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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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대한열망이식지않은아이들에게는고마운존재였다.
“옛날엔 중학교 시험을 봤잖아요? 합격하면 대전에 있는 중학교를 갔죠. 신도안은 두
계사는애들이오기엔거리가멀잖아요?걷거나또는버스를타고다계명중학교로왔죠.
저쪽 향한리에 있던 도곡초등학교 애들, 심지어 동학사 학봉리 사는 애들도 이곳으로 다
녔어요.”
전교생180명으로출발한작은학교였지만,최고로많을때는학생수가300명정도에
이르렀다. 1983년 620사업 시행으로 군부대에 자리를 내어준 계명중학교는 29회 졸업생
을 끝으로 폐교했다. 고향마을 풍경을 그려놓은 한 폭의 그림을 가리키던 강 선생님은 어
린시절공부하고뛰어놀던학교가신기루처럼사라졌다며눈가가촉촉해졌다.고향땅석
계리는더이상가볼수조차없는머나먼곳이되어버렸다.
1971년 두마면 유동리에는 김선문 선생이 설립한 동광재건학교라는 곳이 있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이 중등교육과정과 기술교육을 받는 비인
가 학교였다. 농사를 짓다가 온 아이들도 있었고, 가난해서 학비가 없는 아이들이 어떻게
해서라도배움의끈을놓지않으려고찾아온곳이다.두마면뿐만아니라논산일대또는
공주, 청양 등지에서 온 2~300명의 학생들이 근로와 학업을 병행했다. 비록 일반 학교와
는분위기도다르고가르치는교과목도차이가났지만,교복을차려입고가방을메고학교
에다닌다는것자체만으로도아이들은행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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