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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없어서 유행(有幸, 1702~1883)을 계자로 들였다. 서유행은 군보(君輔)와 국보(國輔) 두 아들
을 두었으며 이들이 각각 2남과 4남을 두어 후손이 점차 널리 퍼지게 되었다. 후손들은 탕정 호산3
리와 천안, 서울 등 각지에 퍼져 살고 있다.
서보수의 묘는 선조들의 묘가 있던 예산 대흥면 탄방리에 있었고 후손들의 묘는 탕정면 매곡리 등
지에 있었으나 최근에 삼봉산 남쪽 자락 선산에 그의 묘를 옮기고 후손들은 납골묘를 만들어 옮겨 놓
았다.
-서보수의 묘와 후손의 납골당-
[52] 대구서씨 서규수
| 徐奎修
<1784년(정조8년)~1839년(헌종5년)>
조선 후기의 인물로 대구서씨(大邱徐氏) 20세이며 도위공파 중 파주공파 아산시 지역, 송악면 거산
리 입향조이다. 선대는 경기도 양주에 거주하다가 그의 아버지 때 양성(안성)으로 이주하였다. 현재
송악 거산1리에 살고 있는 28세(世) 서태원(徐太源, 81세)씨의 8대조이다.
고조는 파주목사를 지낸‘파주공’서정리(徐正履)이고 증조는 서문약(徐文若)이며 조부는 서종억
(徐宗億)이다. 아버지는 서명성(徐命城)이고 어머니는 기계유씨(杞溪兪氏)로 유한종(兪漢宗)의 딸이다.
그는 건수(鍵修), 규수 등 2남1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언제 왜 거산리로 오게 되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혼인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지만 근거는 없다. 약200년 전의 일로 본다. 묘는 거산
리 작은 성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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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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