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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599년(선조 32) 2월 11일에 아산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안장되었다. 그 후 1614년(광해군 6)
지금의 자리인 음봉면(陰峰面) 어라산(於羅山) 아래로 이장(移葬)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묘역 입구에는
영의정 김육(金堉)이 짓고 참찬 죽남 오준(吳竣)이 글씨를 쓰고 병조참판 이정영(李正英)이 전(篆)한 신도
비가 1693년(숙종 19)에 세워졌다. 묘 바로 아래에는
1794년(정조 18)에 왕이 직접 찬(撰)한 어제 신도비(御
製神道碑-상충정무지비)’
가 있다. 그가 남긴〈난중일
기(亂中日記)〉
는〈임진장초 壬辰狀草〉
, 서간첩과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고 다른 유물들도 모두 보물 제
326호로 지정되어 현재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다. 그 밖
에도 여러 편의 시가를 남겼다. 부인 상주 방씨(尙州方
氏)와의 사이에 노량해전에 참전했던 회( )와 열( )·
) 등 3형제와 딸을 두었고, 서자로 훈(薰)·신(藎)
그리고 2명의 딸이 있다.
<어제신도비와 비각>
[74] 이언상
李彦詳
<1681(숙종 7년) ~ 1755(영조 31년)>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덕수(德水)로 이충무공의 5세손이며 자는 방서(邦瑞)이고 호는 노은(老
隱)이다. 부인은 풍양(豊壤) 조(趙)씨이다. 1714년(숙종 40)에 천거로 사복시 내승(內乘)이 되었고 1719년
(숙종 45)에 무과에 급제해서 훈련원정(訓練院正-정3품)을 거쳐 가의대부(嘉義大夫-종2품) 삼도수군통
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올랐다. 1728년(영조 4)에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분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묘는 천안 성성동에 있다.
[75] 이열
, 1571(선조 4년) ~ ? >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덕수 이씨 아산 입향조 정(貞)의 손자이고 충무공 이순신
의 둘째 아들이다. 초명은 울(蔚)이고 자는 자흥(子興)이다. 선조 때에 음사(蔭仕)로 처음 벼슬에 나아갔다
가 광해군 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조반정(1623년)으로 처음에는 충훈부 도사(都事)가 되었다가 찰방(察訪), 형조 정랑(正郞) 등을 역임하
였다. 집안에 비자(婢子-계집종)가 있었는데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다. 광해군이 그 비자를 취하고자 명을
내렸으나 신하의 도리로서 임금에게 미색을 바치는 것은 불충이 된다 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바치지 않았
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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