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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60세 이상인 노인이었다.
송첨지 요셉은 고공(雇工)출신이었다. 그도 1817년 해미관아에 붙잡힌 뒤 배교를 거부하고 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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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편, 손연옥 요셉은 홍주(
) 출신으로 배교를 거부하고 계속 수감
되어 있다가 1824년에 옥사했다. 그리고 손연옥의 부친인 손여심도 아들이 체포된지 3일 후에 체
포되어 해미진영에 압송되었고, 이곳에서 20여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도 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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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거부하고 해미감옥에서 10여 년 동안을 지내다가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1825년 해미진영에서는 주변의 천주교 신도들에 대한 체포작업을 다시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청모 아우구스티노와
바르바라가 체포되어 해미감옥에 구금되었다. 배청모는 당진 태생으
로서 1799년 순교한 배관겸의 아들이다. 그는 부친의 체포 직후 청주(
) 병영에 부친과 함께
수감되었다. 그의 부친이 1799년 사형을 당하자 그는 부친의 시신을 매장할 수 있는 허가를 얻어
부친을 장사지낸 후 탈출했다. 그는 탈출 후 1년간 뱃사공 노릇을 한 다음 4?5년 간을 공주(公 )
땅에 은신하여 지냈다. 그 후 그는 면천 강문이로 거처를 옮겨 그의 천직인 목수 일로 생활을 해나
갔으며, 신도들을 위해 교회서적을 필사하는 일에도 종사했다. 1825년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다
시 체포되어 해미진영에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다했다. 그는 배교를 하지 않았지만 2?3년이
지난 후 석방될 수 있었다. 석방된 후 그는 달 초하루와 보름날 해미진영에 출두하여 근황을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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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했다. 그러다가 그는 1829년 6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한편,
바르바라는 당진 출신이었지만 면천으로 시집을 갔다. 그는 남편 친구 중의 한 사람으
로부터 천주교를 전수 받았다. 그는 과부가 된 뒤에 신도 부인과 처녀들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했
고, 그의 선교범위는 내포(內 )평야 일대에 이르렀다. 그는 이와 같이‘전교회장’
으로 활동하다
가 아산(
) 반대마골에서 1825년 3월 해미의 관원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배교를 강요하는
문초를 여러 번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얼마 후 그는 매달 두 번씩 관장(官 ) 앞에 출두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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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아래 감옥에서 석방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
20) 달레, 위의 책, , 97쪽.
21) 달레, 위의 책, , 98쪽.
22) 달레, 위의 책, , 99쪽.
23) 달레, 위의 책, , 108쪽.
24) 달레, 위의 책, ,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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