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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군서당의운영과교육전반
지?못하는?것이라.?이에?마을의?어른들께서?서당을?세울?것을?의논하고?모임을?하나?만들어?학회라?
이름하였으며,?마을?안에?서당을?두고?한문?초등과를?가르치니,?이는?후일?학교에?입학하는?기본이?
되며?노는?것보다?좋을?것이다.
정성을?다하면?금석도?쪼갤?수?있고?여러?사람이?모이면?하늘의?뜻도?움직일?수?있다.?오직?우리?
마을?안의?인사는?한?마음으로?협력하여?유종의?미를?거둘?수?있도록?할?것을?명심한다.”
-?갑명사숙취지서(甲明私塾?趣旨書?1915년)
1915년 순재(純齋) 유종렬(兪鍾烈) 선생은, 갑명사숙의 교사로서 한문만을 가르치는 서당
에 학교 교육을 더 하여, 도덕·습자·역사·지리·작문·산수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그 당
시의 상갑리를 상상해 보면 산골의 작은 동네 일진대, 자손들의 교육을 위해 50여 명의 회
원이모여자치교육의기반을마련했다고하니,그높은뜻에가슴이뛴다.
복찬규 씨는 면천 복씨 복기용(卜箕龍)과 한양 조씨 조계순(趙桂順)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 당시에 답 4,000평, 전 2,000평 정도의 농토를 가지고 계셨다니, 부농 중에도
부농이었다.아버지복기용씨도어린시절엔갑명사숙의학생이었다.
복찬규 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1년여 서울에 직장에 다닌 이력이 있다. 직장 생활과 서
울의삶에적응하지못하고농사일이천직인듯하여고향으로돌아와농사꾼으로살았다.
“좋고 나쁘고 그때는 잘 몰랐고 서울에서도 마땅히 뭐 할 것이 없었어요. 그때는 다 어려
웠고일거리도많지않았어요.”
“동대문바깥에있었는데거기도농촌이었어요.호박심고그러더라고.”
그는 스물다섯 살에 허계순(許桂順)과 결혼하여 삼 형제를 두었다. 분가할 때 부모님이 논
600평과밭1,000여평그리고집을사주었다.슬하에삼형제를두었다.
상갑리에는 머랭이 할아버지(유계준 선생), 용만이 아저씨 (최병선 선생), 영걸이 할아버지(이의
식선생)가서당을운영했다.그리고공회당또는강당이라불리는곳에서야학도운영했다.
이의식 선생은 70년대까지 서당을 운영했다. 20여 명의 학생이 인근에서 모였고 산너머
봉갑리에서도 왔다. 이의식 선생은 갑명사숙의 문하생으로 후에 마을에 기절비 비문을 썼
다.한문을풀어소개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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