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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군서당의운영과교육전반
없었고그뒤에는서당앞을지나다닐때마다그렇게서러울수가없었다.천자문은집에서
자습하고서당에서는명심보감을배웠다.그때는공부못한것이한이돼어떻게든하고싶
었는데방법이없었다.
‘텃골서당’의 명의철 선생님은 참으로 훌륭하셨다. 다른 곳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도 선생
님이잘가르치다보니,상갑리,농소리,광시에서까지글을배우러사람들이왔다.그런선
생님 밑에서 몇 달이라도 공부한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지만, 오래 배우지 못한 것이 늘
가슴 속에 남아있다. 수업료는 내 본 기억이 없다. 학부모들의 회의로 일 년에 한 번씩 내는
것같았고,선생님이수업료얘기하는것은들은기억이나지않는다.여학생은없었고,같이
공부했던사람들은이제다죽고없다.
명의철(明義喆, 1904~1973) 훈장님은 연안 사람으로 자는 중길(重吉)이며, 호는 소운(巢雲)이
다. 청양 운곡면 후덕리에서 출생하고 명륜학원 졸업한 후 2년간 명륜학원의 훈장으로 학
생들을 교육하였다. 운곡 후덕리 고향에 돌아와서는 청양농업학교에서 역사와 국어, 한문
등을 10여 년간 가르쳤다. 은퇴 후에는 후덕리에 글방을 차리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엄격하면서도 매사에 모범이 돼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선생은 특히 경서와 사기에 정통하
였고, 시문에 뛰어났다. 1957년 성균관에서 개최한 제1회 개천절 경축 전국한시백일장에서
예선에는 장원을, 본선에서는 입상하여 이름을 날렸다. 저서로는 『소운만은(巢雲?吟)』 2권,
『소운만고(巢雲?稿)』1권,『소운잡저(巢雲雜著)』1권이전한다.
김기태 씨는 아내 공기득(10년 전 73세로 작고)과의 사이에 5남매를 낳았다. 배우지 못한 것
이 한이 돼 자식들은 모두 대학교육을 시켰다. 29살에 큰아버지한테서 분가할 때, 할아버
지가 물려주신 논 600평과 밭 750평이 있었다. 워낙 일도 열심히 했지만, 옛날에는 농사를
많이 지었다. 애들 교육하면서도 땅을 많이 사서 논을 1,400평까지 늘렸다. 이상하게 뭐라
도하면그렇게잘됐다.
후덕리에서 3번째로 구기자 농사를 지었으며, 어슬티와 위라리 등에서 묘목을 구하여 연
구도많이했다.당시쌀한말값이250원이었는데,구기자한근은300원이었다.이때는쌀
값도 비쌌었다. 정부미도 없고, 수리시설이 안 돼 물 때문에도 벼농사 짓기가 어려웠다. ‘춘
대추납’이 있었던 시기로, 없는 사람들은 부잣집에서 쌀 한 말 갖다 먹고, 일을 열흘씩 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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