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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잊혀진시간을말하다3
청양군??
할아버지 경기 김동년 씨는 홍성 홍동면 문당리에서
서당의?운영과?교육전반
살다가 무슨 연고로 이곳 청양군 운곡면 후덕리 텃골
공부못한
로 와 자리 잡았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증조할아
한이씨꺼멓게
버지한테 양자로 왔으며, 아버지는 3형제 중 막내였
다. 후덕리 292번지에서 태어난 김기태(金基泰) 씨는 여
가심에쌓였유
섯 살에 아버지 김세환이 돌아가셨고 열한 살에 어머
니 연안 명씨도 돌아가셨다. 한 번도 어머니의 이름을
불러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어머니의 이름을 모른다.
호적이나 봐야 알 것 같으며, 외갓집은 비봉리다. 형제
로는여동생이한명이있다.
집안의 가훈이나 전통은 들어본 적이 없다. 농사 채
김 기 태(1936년생)?
가 많은 큰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며 26살에 결혼, 29
청양군?운곡면?청신로
살에 분가를 하였다. 큰아버지는 일 욕심이 많아 땅도
많았다. 당시 논이 30마지기(6천 평)였고, 딸만 있어 작
은새어머니로부터아들을낳았다.
운곡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자마자 4월 초에 어
머니가 돌아가셔서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그해 여름에 해방이 되었다. 아침 먹고는 나무하러 다
니고, 저녁 먹고는 새끼를 꼬며 집안일을 거들었다. 사
촌 형님이 초등학교 옆에 살았는데, 그곳에 가서 공부
도 배우고 한문도 조금씩 배웠다. 17살에 서당엘 몇
개월 다녔다. 큰아버지는 일 안 하고 서당에 다닌다고
성화셨지만, 다행히 집과 서당이 가까워 촘촘히 다닐
수있었다.서당에가서큰소리로글을읽으면하루일
의 곤함도 이겨낼 수 있었다. 결국은 농사일로 큰아버
지의 걱정이 심해 몇 개월 만에 공부를 그만둘 수밖에
충남,잊혀진시간을말하다3
청양군??
할아버지 경기 김동년 씨는 홍성 홍동면 문당리에서
서당의?운영과?교육전반
살다가 무슨 연고로 이곳 청양군 운곡면 후덕리 텃골
공부못한
로 와 자리 잡았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증조할아
한이씨꺼멓게
버지한테 양자로 왔으며, 아버지는 3형제 중 막내였
다. 후덕리 292번지에서 태어난 김기태(金基泰) 씨는 여
가심에쌓였유
섯 살에 아버지 김세환이 돌아가셨고 열한 살에 어머
니 연안 명씨도 돌아가셨다. 한 번도 어머니의 이름을
불러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어머니의 이름을 모른다.
호적이나 봐야 알 것 같으며, 외갓집은 비봉리다. 형제
로는여동생이한명이있다.
집안의 가훈이나 전통은 들어본 적이 없다. 농사 채
김 기 태(1936년생)?
가 많은 큰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며 26살에 결혼, 29
청양군?운곡면?청신로
살에 분가를 하였다. 큰아버지는 일 욕심이 많아 땅도
많았다. 당시 논이 30마지기(6천 평)였고, 딸만 있어 작
은새어머니로부터아들을낳았다.
운곡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자마자 4월 초에 어
머니가 돌아가셔서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그해 여름에 해방이 되었다. 아침 먹고는 나무하러 다
니고, 저녁 먹고는 새끼를 꼬며 집안일을 거들었다. 사
촌 형님이 초등학교 옆에 살았는데, 그곳에 가서 공부
도 배우고 한문도 조금씩 배웠다. 17살에 서당엘 몇
개월 다녔다. 큰아버지는 일 안 하고 서당에 다닌다고
성화셨지만, 다행히 집과 서당이 가까워 촘촘히 다닐
수있었다.서당에가서큰소리로글을읽으면하루일
의 곤함도 이겨낼 수 있었다. 결국은 농사일로 큰아버
지의 걱정이 심해 몇 개월 만에 공부를 그만둘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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