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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다. 그런데 택의 처가와 관련된 어떤 사건(확인되지 않
음)이 일어나자 피해를 우려해서 아들과 손자를 각지로 흩
어져 피하게 했다고 한다. 아버지 팽노는 강원도로 갔고 외
아들이었던 그는 김포에서 뗏목을 타고 아산만을 거쳐 곡교
천을 거슬러 올라와서 강청리에 은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합천 이씨는 강청리에 가장 먼저 뿌리를 내려서
지금까지 500년 정도의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 오고 있다.
그의 손자 영(英)은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올랐고 행(荇)
은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의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
<합천이씨 납골당>
하여 선무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 영(英)의 아들인 증손자
정형(廷亨)은 부호군에 올랐다.
그의 묘는 염치읍 산양리 송죽동에 있었으나 다른 후손들의 묘와 함께 몇 해 전에 염치읍 강청리의 종중
납골당으로 이장되었다.
[73] 이순신
李舜臣
<1545(인종 1년)~1598(선조 31년)>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충신이다. 본관은 덕수(德水)로 정정공(貞靖公) 대제학 변(邊)의 5세손이며 병조
참의 거( )의 증손자이고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 백록(百祿)의 손자이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던 아
버지 병절교위(秉節校尉) 정(貞)과 어머니 초계(草溪) 변(卞)씨 현감 수림(守林)의 딸 사이의 4남 중 3남으
로 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한성부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대부터 집안이 어려워져서
1553년(명종8-추정)경에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모두 외가(外家)가 있는 아산 염치 백암리(뱀밭)로 들어왔
다. 이곳에서 형제들과 가난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21세 되던 1865년에 이웃 월곡 마을에 사는 상주
(尙州) 방씨 보성군수 진(震)의 딸과 결혼한 뒤부터 본격
적으로 무과(武科)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28세 때 훈련
원별과(訓鍊院別科)에서 낙마(落馬)로 부상을 입고 실패
했으나 32세 때인 1576년(선조 9)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그 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 권관
(權管)으로 부임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훈련
원봉사와 충청병영 군관을 거쳐 1580년(선조 13)에 발포
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종4품)로 처음으로 수군 직책을
맡았다. 2년 뒤 모함으로 파직되어 함경병영 군관이 되
었고 이어 건원보(乾原堡) 권관으로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워 훈련원참군이 되었으나 부친상(1583. 11)으로 3년
<이순신 표준 영정(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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