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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서원 입지환경과 주변의 관련 암각체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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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아산에당도하니병이나서더이상수행할수가없으므로자기임무
를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에게 부탁하니 유성룡이 선생의 손을
잡고눈물을흘리는지라선생은그를보고정색하고그대의이러한눈물
이임진왜란전에있었다면오늘과같은사태가없었을것이아닌가하고
꾸짖으니 유성룡도 탄복했다고 전한다. 또한 선생은 효성도 지극하여
우계와율곡두선생도선생의모친변환에꼭그방에들어가서문병하였
고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도 그의 도학을극진히 칭찬하였으며 남언
기(南彦記)도 인간사표라고 칭찬하였다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쟁이
날마다더해지므로 정도(正道)가수습되지못하여마침내선생의큰뜻을
펴지 못하고 말았다. 뒤에 묘비는 후재(厚齋) 김간(金?)이 쓰고 행장은
장암(丈岩) 정공(鄭公)이 찬했으며 이러한 사실은 율곡, 우계, 사암 등 여
러 선생 문집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3. 회암서원의 철폐와 유허비 건립
19세기이후의시대로서원의남설로인한흥선대원군은둘째아들
이어린나이로1863년12월26대국왕에오르자설정을하면서이듬해
부터 서원을 철폐, 정리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공자가다시살아난다하더라도나는용서하지않겠다. 하물며서
원은 우리나라 선현을 제사하는 곳인데 오늘날 도둑의 소굴이 되어
있지 않은가?”라는 대원군의 말은 서원 철폐에 대한 단호한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당시서원은선현에대한제향과지방의인재양성을위한일종의
사설 교육기관 역할을했지만, 갈수록당쟁의 소굴이되고지방민을
침탈하는 폐단을 낳았다.
15)
15) 서원등록에보이는덕산지역서원에관한기사. 1722년(경종2) 9월5일조에
보면, 덕산현의 유생 정세갑(鄭世甲) 등이 과거의 폐단을 논하면서 말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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