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94페이지

47페이지 본문시작

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예산학 특강 - 禮山이 낳은 금석학자 秋史 金正喜 재조명
김정희는 우리나라에서 금석문 연구를 ‘금석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선구자다. 김정희는 금석자료
로 하였던 청유(淸儒)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의 경우에 비해 한 단계 나아간 것으로 평가되어
를 호고적(好古的) 취미로 대하던 당시까지의 풍조를 비판하고, 중국의 경우를 들어 금석학이 독립
야 할 것이다. 김정희는 고증학적 연구 방법과 현장 조사를 두 축으로 하여, 종래 해제(解題) 정도
된 학문으로 발전하였음을 주장하였다. 또 경학과 역사학에서 필수 불가결한 보조적인 학문 분야라
에 머물던 조선 금석학의 수준을 ‘학’의 단계까지 끌어올리고,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금석학파를 성
고 하여 그 효용을 역설하였다.
립시켰다.
금석학에 대한 김정희의 열정과 집착은 현장 조사로 이어졌다. 현장에 가지 못할 경우 그 고을의
금석학이라는 학문은 스스로 독립된 한 문호가 있거늘,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이것이 있는 줄을
수령 등 지인들을 통해 탁본을 해줄 것을 부탁해 마지않았다. 그렇게 해서 수집된 것이 그 수를 헤
모르고 있다. 요즈음 전(篆)·예(隸)를 한다는 제가(諸家)도 그저 그 원본(原本)을 찾아 한 번 베껴 올
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김정희가 남긴 서한 가운데 “돌이켜 볼 때 이 40년 동안 깊숙이 숨은 것을
뿐이니, 경학과 사학을 우익(羽翼)한다거나, 분예(分隸)의 같고 다른 것을 밝힌다거나 편방(偏旁)이 변
찾아내고 비밀스러운 것을 척발(剔發)하며 고심한 것이 어찌 호사가(好事家)가 기이한 것을 좋아하
1)
해 내려오는 것을 고구(考究)한 적이 있었겠는가.
여 한 것이겠는가”
4)
라고 한 대목이 있다. 금석학 연구에 임하는 김정희 자신의 심경을 진솔하게 나
타낸 것이라 하겠다.
대개 이 진흥왕순수비는 단순히 우리나라 금석의 시조가 될 뿐만이 아니다. 신라의 봉강(封疆)에 대
필자가 과문(寡聞)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김정희의 금석학 연구를 정면으로 다룬 것
하여 국사(國史)를 가지고 상고해 보면 겨우 비열홀(比列忽: 安邊)에 미치고 있다. 이 비를 통해서 보
은 몇 편에 불과하다.
5)
최완수의 「김추사의 금석학」(1972) 이후, 아직까지 후속 연구가 제대로 나오
지 않으면 어떻게 신라의 봉강이 멀리 황초령에까지 미쳤음을 다시 알 수 있겠는가. 금석이 국사보다
지 못하고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는 듯하다. 그러나 ① 청조의 학술 문화와 김정희의 북학사상, ②
나은 점이 이와 같다. 옛 사람들이 금석을 귀중하게 여긴 까닭이 어찌 하나의 고물(古物)이라는 것에
청조의 고증학과 금석학, ③ 옹방강·수곤(樹崑) 부자(父子)를 비롯한 청조 학인들과 조선학인들 사
2)
만 그칠 뿐이겠는가.
이의 교류 ―특히 금석연(金石緣), ④ 김정희의 서법(書法)·서파(書派) 등과 관련된 비교적 풍부한
김정희의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와 2006년에 공개된
자료와 적지 않은 수의 논고들이 있어, 연구 전망이 어둡지는 않다고 본다.
『해동비고(海東碑攷)』
3)
는 조선 금석학의 존재 의의를 되새기
다만, 김정희의 금석학 연구에 대한 조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 김정희의 금석학 연구
게 하는 업적이다. 그 수준에서도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
성과에 대한 관심과 소개의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 심도 있는 논의가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김정
할 수 있다. 비문의 글자를 심정(審定)하는 석문(釋文)에서
희의 권위와 명성에 눌린 나머지 김정희의 학문과 사상과 예술은 그 특징과 의의만 부각되었을 뿐
단연 조선 최고의 금석학자다운 전문성을 보였을 뿐만 아니
그 한계성 등에 대해서는 언급 자체가 거의 없었다. 금기시(?)되었던 측면도 없지 않다.
라, 비문 내용의 고증에서도 현대적 의미의 논문을 방불케
본고에서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김정희의 금석학 연구 성과를 재조명하려 한다. 특히, 종래
한다. ‘연구논문집’이라는 평가가 지나치지 않다.
연구 가운데 사실과 다르거나 잘못 알려진 것을 바로잡고 칭예(稱譽) 위주의 서술에서 탈피함으로
써, 김정희의 금석학 연구 성과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김정희의 금석학은 과연 조선의
김정희에게 금석학은 단순히 완상(玩賞)이나 감식(鑑識)을
선배 학인들이 이룩한 학문적 성과와는 무관한 것인가, 추사 금석학의 한계는 무엇인가 하는 점에
위한 취미로서가 아니고 엄연히 독립된 학문 영역이었다. 금
주목하여 논의를 진행할까 한다.
석에 대한 김정희의 학구적 정열과 태도는 감상과 감식을 주
필자는 선유(先儒)의 학문적 성과를 폄하하려는 생각이 추호도 없다. 있는 사실을 충실하게 밝히
해동비고(박철상 소장)
1) 『완당전집』 권2, 36b, 「申威堂」 “金石一學, 自有一門戶, 東人皆不知有此. 如近篆隸諸家, 但就其原本, 謄過一通, 而何嘗有
4) 秋史簡札, “顧此四十年搜幽剔秘之苦心, 豈好事喜奇爲哉.”(『추사연구』 8, 추사연구회, 2007, 316쪽 所引) 
考究於羽翼經史, 與分隸同異, 偏旁有變者也.”
5) 『해동비고』를 발굴, 공개한 박철상 씨가 2007년 1월 27일 예술의 전당에서 발표했다는 「‘해동비고’의 출현과 추사 김정희
2) 『완당전집』 권3, 32a, 「與權彛齋敦仁三十二」 참조.
의 금석학」(유인물, 비공간)은 아직 구해보지 못했다. 전언에 의하면 박씨가 계명대학교 대학원에 제출한 「추사 김정희의
3) 2007년 1월 7일자 및 1월 8일자 여러 신문기사 참조.
금석학 연구: 역사고증적 측면을 중심으로」(석사학위 논문, 2011. 2)에 재정리되었다고 한다.
46 ?
? 47

47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