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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여러 도의 절도사를 지내고 온창군(溫昌君)에 봉해진 충숙공(忠肅公) 방재(方宰-7세) 이후에는 묘
에 대한 기록이 없다가 9세인 방희진(方曦進)부터 경기도 양주 동두천에 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집안에서는‘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훼손되었다. 배방산은 원래 방운의 묘가 있어서 방씨
에게 절을 한다는 의미의 배방(拜方)이었는데 이것이 방씨를 배척한다는 배방(排方)으로 바뀌었다가
나중(1914년)에 꽃다울 방(芳)으로 바꾸어 현재의 배방(排芳)이 되었다’
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온양방씨가 초기에는 온양 지역에 거주하였으며 방운이 시조이자 입향조라
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거주지 등 세부적인 사항을 알 수 없으며 배방산과 탕정 등 아산시 지역에
있는 묘는 모두 실전되어 확인되지 않고 용화동 숫골에 단(壇)을 만들어 배향하고 있다.
7세 이후에도 아산시 지역에 후손이 살고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
온양방씨 세거지인 평택 팽성 지역에서 다시 아산시 지역으로 26세(世) 방동귀와 방동벽 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 약 300년 전의 일이다. 이들은 6촌간이며 온양방씨 간의공파(諫議公派)이다.
방동귀(方東貴, 1693~?)는 도고면 시전리로 들어왔다. 입향 사유와 정확한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
다. 증조는 군수 방유(方瑜, 1590~?), 조부는 효자 정려가 내려진 방이흠(方以欽)이다. 아버지는 증
통정대부 방익립(方益立)이고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정시세(鄭時世)의 딸이다. 부인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김만형(金萬亨)의 딸이다. 아들 용수(龍壽), 손자 시간(時艮) 등으로 후손이 이어지
며 시전리에 거주하다가 5세손(31세) 준순(準淳)에 이르러 초사동 지역으로 이주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초사동에 거주하고 있는 후손 34세(世) 방효식(方孝植, 81세)씨로 보면 방준순은 증조, 방
-온양방씨 중시조 방운 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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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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