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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랐으나 뒤에 무예를 익혀 26세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울진현감·훈련원정·내금위장·삼화부사·승
지·충청병사·어영청중군·용호영대장·훈련원도정 등을 거쳐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이인좌의 난
(1728년) 때 공을 세워 무훈(武勳)이 기록되었으며 이충무공을 매우 흠모하였고 검에 충성을 다짐하는 글
귀를 새겼다고 한다.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는데 말년에 과거의 일로 무주에 유배되기도 했다. 1년 뒤 풀
려났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45세로 세상을 뜨고 복권되었다.
[66] 이봉
< ? ~ ? >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충무공 이순신의 둘째 형인 여흠(汝欽) 요신(堯臣)의 아들
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로 첨사(僉使)에 올랐다. 임진왜란 당시 숙부(叔父)인 이순신의 막하(幕
下)에서 시종일관 최후까지 용전(勇戰)한 맹장이었다. 묘는 음봉면 삼거리 이충무공 묘소 서쪽 능선의 덕
수 이씨 종중 묘역에 있다.
[67] 이분
李芬
<1566(명종 21년) ~ 1619(광해군 11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덕수(德水)로 덕수 이씨 아산 입향조 정(貞)의 손자이고 충무공 이순신의
맏형인 증 참판(贈參判) 희신(羲臣)의 아들이다. 자는 형보(馨甫)고 호는 묵헌(默軒)이다. 임진왜란 때 평
안도 성천(成川)으로 피난해서 그곳에서 당시 성천부사이던 한강(寒崗) 정구(鄭逑)에게 수학했다. 정유재
란 때는 이순신의 막하에서 활동했는데 고금도 통제영에서 군중 문서를 맡으면서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
는 일도 담당했다. 1603년(선조 3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낭
청, 좌랑을 거쳐 병조정랑을 지냈다. 음악과 산수에 밝았고《가례박해(家禮剝解)》
, 《방례유편(邦禮類編)》
을 저술했다.
[68] 이사종
李嗣宗
< ? ~ 1589(선조22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예안 이씨 17세(世)로 온양파(수온파-수원·온양파) 입향조다. 부친 장사랑 이연
(李 )과 모친 안동 권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외암리 골말에 자리 잡고 있던 평택 진씨 참봉 진한
평(陳漢平)의 사위가 되어 1546년에 온양으로 이주하였으며 부친의 묘소를 송악면 유곡 1리 사기소 마을
에 모셨다. 아들이 없던 진한평의 재산을 물려받아 물적 기반을 마련하고 오늘의 외암 마을과 예안 이씨
온양파를 이루게 되었다.
‘별제공’
으로 호칭되니 현재 외암 마을의 종손인 이준세(李準世)의 15대조이다.
그는 외암 마을에 자리 잡은 뒤 1569년경에 열승정(閱勝亭)을 지었고 그의 사위 최립(崔 )이 지은‘열승
정기’
가 남아 있다. 조선 중기 선조 때에 수성금화사 별제 승훈랑(修城禁火司 別提 承訓郞, 정6품)을 지냈
다. 수성금화사는 조선시대 왕성과 도성의 성곽과 도로 교량 등을 수축하고 화재 진압을 담당하던 관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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