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77페이지

45페이지 본문시작

주민들의 안녕과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안녕과 이 지역의 지대가 낮아서 홍수와 재앙을
막아 달라고 하는데서 노신제를 지내게 되었는데 내의 물줄기를 가로 지르는 위치에 장방
형의 거북 모양의 커다란 돌 길이
2m 60cm,
넓이
2m 30cm
의 표면에 나타난 부분이 돌
출되어 있어 그 거북 모양의 다리를 밟고 내를 건넜는데 이곳에서 노신제를 지냈다 한다.
200
년 이상일 것이라는 동네 어른들의 이야기다 노신제 후 마을 인근에 있는 버드나
무 참봉제 도깨비제 를 지냈다고 한다 버드나무의 수령은 알 수 없으나 수령이 오래된 것
으로 옛날에는 버드나무에 도깨비가 살았다고 하는데서 참봉제 도깨비제 를 지내게 되었
다고 한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고 있으며 노신제 거북제 는 음력 정월
14
일 저녁 거북
다리라는 곳에서 노신제 길제 를 지내는데 생기 복덕을 보아서 닿는 사람으로 정하게 되
는데 부정에 관여 되어서는 아니되며 정결해야 하며 노신제를 지내기 일주일 전부터 거
북 다리 양쪽 가장자리에 금줄을 쳐서 왕래를 금했고 제수로는 삼색과실과 돼지머리를
놓았는데 돼지는 반드시 우리나라의 토종 돼지인 검정돼지를 썼고 참봉제 도깨비제 에서
는 제수용품으로 개의 머리를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도깨비들이 개의 머리를 좋아해
서라고 한다 먼저 노신제를 지낸후 참봉제를 지내게 되는데 그것의 고유문에는 오방대장
에게 안위를 축원하는 제사와 이 지역이 지대가 낮아서 홍수와 재앙을 막고 행인들의 안
녕을 위하여 빌었는데 여기에서 오방 대장이란 동 서 남 북 중앙등 방향을 말하는 것으로
· · · ·
각 바향의 장군을 색으로 표현하였었다 동쪽은 청제장군 서쪽은 백제장군 남쪽은 적제
장군 북쪽은 흑제장군 중앙은 황제장군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이란 거북 다리
선장 합덕 지역을 말한다고 한다
차 노신제가 저녁
11
시쯤 끝나면
2
을 짓고 제상을 차려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유사 제주 는 흰옷과 흰 고무신을 신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지 정리로 인해 다리도 없어지고 거북 바위 또한 어디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마을에 음력 칠월칠석으로 마을 어른들을 모시고 음식을 나누어 먹고 효도 관광
을 봄 가을에 보내 드리고 있다
9)
특별하게 소개할 만한 인물
열녀 정씨 부인
이 열녀 정문은 아산군 신창면 신달리
1
여조때의 선략 장군이요 선전관을 지낸 해주오공 도빈의 부인 정 영인 여사의 덕행을 기
린 정문이다 정씨는
1649 (
년 인조
27)
에 출생하시어 해주 오공 도빈의 처가 되었고 고된
시집살이를 하면서 시어머니에게 효행을 다하고 남편을 지성으로 섬겼다 공의 사후에도
생시와 다름없이 봉선지절의 예를 다 하시고
1728(
영조
4
19
79
세의 일기로
별세 하였다 이와 같이 영인 여사의 뛰어난 정절에 크게 감동한 도내 열 읍 선비들이 뜻
을 같이 하여 이 열녀문을 세우도록 조정에 상소하여
1763
년 영조
12 )
년 에 특병이 내리
어 이 정문을 세웠다 한다.
진수린
고종
35
(1898) (1930)
독립운동가 아산군 신창면 신달리
181
번지에서 출생한 그는 항일독립운동가
動家
인 최익수와 사촌 남매간
으로 두 사람은 평소 매우 친밀
한 사이로 지
냈었다 그는 최익수의 항일독립사상
에 감화
되어 가던 중
3·1
독립만
세사건
이 일어나자 일제
에 대한 우리 민족
에 대한 학살
고문
등 세계
에서 찾아보기 힘든 천인공로
할 야만적
인 행동
에 격분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되어 항일독립운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군자금모금
金 金
을 위해 상해임시정부
로부터 본국에 돌아온 최익수
의 뜻을 도와 그가 근무
하던 아산금융조합
공금
公金
을 독립운동자
금으로 빼내기로 한 후 온갖 어려움을 무릎쓰고 공금을 빼내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는 최익수 이종락과 함께 그 공금을 가지고 상해로 갔다 이 세사람의 독립투사중
이종락
은 그 곳에서 독립운동
을 하던중 이질병
을 얻어 세
상을 떠났고 최익수는 재차 군자금모금
을 위해 본국
에 돌아왔고 그는
상해에 머물러 있으면서 독립운동
을 계속
했다 그가 상해
에서 활동
한 사항
에 고나해서는 그 자료
의 소실
로 알 바가 없다 다만 그
당시
의 상황
을 증언
을 통해서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증언
에 의하
면 독립운동
을 하기 위해 가정
도 직장
도 젊음도 버리고 생명을 걸
고 왜적
과 싸워서 조국광복
國光
의 그 날을 위해 온갖 정열
을 바쳤다고
한다 그는
1929
년경
상해에서 체포
되어 공주지방검찰청
에 이

45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