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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치고 종을 부리는 데도 사랑스럽게 하면서 법도가 있었다.
선생이 일찍이 병에 걸려 위독하자 부인은 손가락을 베어 피를 약에 타서 먹였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서는 상중에 먹는 법도를 3년 동안이나
지켰다. 이에 군자들이 말하기를 장부도 실천하기가 어려운 일이라 하였다. 무당과
장님의 굿이나 기도하는 것 등은 일체 하지 않았다. 집안이 비록 가난했으나 오직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정성스럽게 모심은 물론 제물 또한 풍성하게 차렸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선생의 덕행이 자기 집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알았다.
만력 을묘(광해군 7년, 1615년) 3월에 돌아가셨다. 선생이 출생한 가정 경자년까지
나이가 76세였다.
5남 2녀를 낳았다. 선생의 셋째 아들 참봉 자 씨가 지난날에 나를 아산의 바닷가로
찾아 왔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그 평생의 행적을 적은 글과 유고를 나에게 주면
서 비문을 부탁했다.
“당신의 돌아가신 아버님은 내 아버지와 과거에 동시에 급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가장 절친했던 친구 사이였소. 그리고 당신은 이미 홍양청난비를 지은 바 있
으니 내 아버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세상에 당신만한 사람이 없을 터이오. 그러기에
거듭 당신에게 우리 아버님의 비문을 부탁하오.”
하였다. 이에 내가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고 외람되이 허락 하였었다. 그 후 참봉이
죽은 지도 이제 10여년이 되었다. 그런데 지난해에 선생의 손자 우언이 북청에서
고을 수령의 보좌관 소임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에게 들려 울면서 말
하기를,
“숙부께서 부탁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묘에 세울 비문에 대한 일을 당신께서는
잊어 버리셨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민첩하지 못함을 사죄하고 늙은 몸에 병이 들어 글을 쓰
기가 어렵다고 사양했다. 그러나 우원 씨가 끝까지 간청하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드
디어 선생의 평생 동안의 행적을 자세히 참고해서 본말을 기록하고 공경하면서 글
로 써서 교훈으로 삼으려 한다.
명(銘)에 이르기를,
“옛날 우리 선왕께서 무력이나 권모술수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물리치고 유교
(儒敎)를 숭상하였다. 쉬고 있던 선비들은 세상의 쓰는 바가 되었도다. 사헌부에서
아산의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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