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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이덕민
李德敏
<1543(중종 38년) ~ 1618(광해군 10년)>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용인(龍仁)이며 자는 계도(季道), 호는 송파(松坡)이다. 아산현 남면 백암
리에 살았으며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다. 유복자로 태어나서 부친의 얼굴을 알지 못함을 항상 통
한(痛恨)하여 모친상을 당하자 경기도 용인 구성에 있는 부친의 묘에까지 모시고 가서 합장한 뒤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며 상복을 벗지 않았다. 모친 3년상을 마친 뒤에 전에 하지 못했던 부친상으로 다시 3년 동
안 상복을 더 입었다. 상을 모두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의 딸이 부인 최(崔)씨에게‘문 밖에 머리 센 웬 노
인이 왔다.’
고 말했다고 한다. 부인이 아들들에게 한 번도 그가 버선을 벗은 발 모양을 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을 만큼 철저하고 엄격하게 살았다. 중형(仲兄) 사민(思敏)이 조금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늘 찾아가
뵐 때는 대문 밖에 서서 절한 뒤 지팡이를 울타리에 세워 두고 달려 들어가 부복(俯伏)하여 형이 만류하
곤 했다고 한다. 만전(晩全) 홍가신(洪可臣)이 그 의(義)를 흠모하여‘군자정전죽 청청도세한(君子庭前竹
靑靑到歲寒-겨울에도 푸르디 푸른 뜰 앞의 대나무와 같은 군자다.)’
라는 글귀를 남겼다. 그는 벼슬에 뜻
을 두지 않았던 은일(隱逸)로서 존숭되었다. 조용히 의리를 실천하고 오로지 자기의 학문을 위하여 힘썼
으며 고향에서 홍가신, 송곡(松谷) 홍익현(洪翼賢)과 함께 도의로써 교유하며 강학(講學)하였다. 1668년
(현종 9)에 인산서원(仁山書院-1610년 건립)에 배향되었고《대동기문(大東奇聞)》
에 그의 일이 실려 있다.
묘는 도고면 농은리 열명이(열멩이) 용인 이씨 종중 묘역에 있다. 뒷면에‘인산서원지(仁山書院址)’내용
이 기록된 묘비가 있다.
<이덕민의 묘비>
<인산서원지 내용이 기록된 묘비 뒷면>
[65] 이복연
李復淵
<1688(숙종 14년) ~ 1732(영조 8년)>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로 경명군(景明君) 침( ,
1489~1552)의 8세손이다. 전주 이씨 아산 입향조인 장의(掌議) 생인(生寅)의
증손자이고 사헌부 집의 제형(齊衡)의 손자이며 쌍호당 단석(端錫)의 아들이다.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집안이 빈궁하여 어렵고 병약하게
<이복연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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