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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말하니, 선생이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세상 사람들이 그를 박학(博學)한 사람이라고 일컫는데 잘못 본 것이다.”
하였다.
기축년의 옥사(獄事)때는 역적이 많이 죽었는데, 선생은 이때도 낌새를 먼저 알았
다는 기색이 없었다. 이발 형제가 매를 맞다가 죽으니, 선생은 옷을 벗어 시체를 덮
어 주었다. 곡을 하며 입관과 염습과 장례 지내는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자제들이
울면서 말렸으나 선생은,
“내 진실로 그의 원통함을 아는데, 어찌 화를 입고 복을 누리는 것을 가지고 마음
을 바꾸겠는가.”
하였다. 사람들은 선생이 후일에 화를 입을까 걱정하였으나, 다행히 선생의 평소
사람됨을 아는 이들의 힘을 입어 화를 입지는 않았다.
선생의 효행이 독실한 것은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17?18세 때에 계모의
병환을 간병하였는데 그 증세가 여러 가지였다. 선생이 계모의 말을 듣고 의원에게
가서 처방약을 물어보고 돌아왔다. 계모가 의원에게 무어라 말했는가를 물었다. 선
생은 무릎을 꿇고 앉아 일일이 아뢰었다. 단 한 마디도 빼놓는 데가 없자 계모는,
“정성이 지극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 같이 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의원도 또한,
“어버이의 병환으로 내 집에 오는 자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지극한 정성으로 사람
을 움직이는 것은 홍 수재만한 자가 없었다.”
하였다. 약을 파는 사람도 좋은 약재를 골라 놓고 기다렸다. 많이 늙은 뒤에도 하
루라도 새벽에 사당을 참배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제사 음식은 반드시 친히 장만하
여 보살폈다. 비록 자제들에게도 대신 시키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슬프도다. 선생의 학문은 실체에 가장 밝고 쓰임에 적당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임
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봉양할 때나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백성을 다스리고 친구를
접대하며 큰일에 임하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좌우로 근원을 만나 그
정당함을 얻었다. 그러므로 선생이야 말로 가위 넓고 크고 통달한 선비라 하겠다. 이
에 아산과 온양 두 고을의 선비들은 선생을 위하여 각각 서원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부인 재령 이씨는 정경부인으로 봉해졌는데, 사축별제(司畜別提) 형(衡)의 따님이
다.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맑고 밝아서 남편을 밤낮으로 공경하여 섬겼다. 자손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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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의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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