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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
物
禮山의
이란칭호를들으며1549년(명종4년)에창건된것에비하면김구의서원건립은매우늦은
편이다.
창건상소로서원이건립된것은1705년(숙종31년)이었다.사액받은것은1714년이고당
시 예관으로는 예조정랑 박사동(朴師東)이 파견되었고 사액치제문이 광산김씨직장공진보
(光山金氏直長公振譜)에수록되어있다.사액받은이후덕잠서원의영향력이더욱커져이
를토대로1746년(영조22년)에는자암김구가다시이조판서양관대제학에추증되게하고,
다음해인1747년(영조3년)에는문의공(文懿公)이란시호까지받게되었다.
또하나김구의손자김갑의효자정려가1816년김구묘소전방에세워졌다.김갑은1550년
경태어난인물로임진왜란당시어머니를모시고가다왜적에게살해당하였는데1500년대
인물이1800년대정려호장을받고정려를건립하게된것은김구와덕잠서원을통한광산
김씨문중의영향력이라고보아진다.
덕잠서원은그후100여년이지난1813년(순조13년)김조순이중수비용을전담중수했으
며1830년(순조30년)홍병식(洪秉拭)의주력을재실(齋室)중수가(重修)가이루어졌으며
1856년(철종7년)에는김조순의아들김좌근이3천냥을출연하여중수하였으나그후1868
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書院毁撤令)으로 사라졌으며 지금은 밭으로 경작되어 초석(礎石)
과 와편(瓦片)은 밭가에 쌓여있다. 밭에도 불탄 재와 와편 토기편 백자편 등이 노출되어 있
으나어느누구도덕잠서원자리인지알지못하고있다.
그의 사후 유허지인 예산의 덕잠서원과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 1664년 창건, 1695년
사액),장단의임강서원(臨江書院),남해의죽림서원(竹林書院)에영정이봉안되어있었다.
관련유적은김구의묘소가신암면종경리에있으며묘비는1640년인조18년에건립되었
고,유허비는1984년건립되었는데이때신도비도함께세웠다.
※관련일화전설:자암은경학연구는물론이고,특히철학적사색이깊어제자백가의학문
에까지넓고깊은고찰이있었음을그문집에서엿볼수있다.
자암은 음악에도 깊은 소양이 있어, 별곡, 단가 등을 지어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중종때 악
정(樂正)의벼슬에임명된것도그러한때문이었다.전해오는말로는어느날밤자암이궁
중의옥당(玉堂)에서숙식을하면서,밤늦도록낭랑한목소리로독서를하고있었다.갑자기
문 두드리는 목소리가 나더니 중종이 청상(廳上)에 오르시고, 별감(別監)은 주찬(酒饌)을
들고따라왔다.
자암이급히나가뜰아래엎드리니왕이올라오라하시며“이같이달 밝은밤에글읽는소
리가 좋아왔으니 군신의 예를 버리고, 벗으로 대하자 하시며 술잔을 나누었다. 왕이 가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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物
禮山의
이란칭호를들으며1549년(명종4년)에창건된것에비하면김구의서원건립은매우늦은
편이다.
창건상소로서원이건립된것은1705년(숙종31년)이었다.사액받은것은1714년이고당
시 예관으로는 예조정랑 박사동(朴師東)이 파견되었고 사액치제문이 광산김씨직장공진보
(光山金氏直長公振譜)에수록되어있다.사액받은이후덕잠서원의영향력이더욱커져이
를토대로1746년(영조22년)에는자암김구가다시이조판서양관대제학에추증되게하고,
다음해인1747년(영조3년)에는문의공(文懿公)이란시호까지받게되었다.
또하나김구의손자김갑의효자정려가1816년김구묘소전방에세워졌다.김갑은1550년
경태어난인물로임진왜란당시어머니를모시고가다왜적에게살해당하였는데1500년대
인물이1800년대정려호장을받고정려를건립하게된것은김구와덕잠서원을통한광산
김씨문중의영향력이라고보아진다.
덕잠서원은그후100여년이지난1813년(순조13년)김조순이중수비용을전담중수했으
며1830년(순조30년)홍병식(洪秉拭)의주력을재실(齋室)중수가(重修)가이루어졌으며
1856년(철종7년)에는김조순의아들김좌근이3천냥을출연하여중수하였으나그후1868
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書院毁撤令)으로 사라졌으며 지금은 밭으로 경작되어 초석(礎石)
과 와편(瓦片)은 밭가에 쌓여있다. 밭에도 불탄 재와 와편 토기편 백자편 등이 노출되어 있
으나어느누구도덕잠서원자리인지알지못하고있다.
그의 사후 유허지인 예산의 덕잠서원과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 1664년 창건, 1695년
사액),장단의임강서원(臨江書院),남해의죽림서원(竹林書院)에영정이봉안되어있었다.
관련유적은김구의묘소가신암면종경리에있으며묘비는1640년인조18년에건립되었
고,유허비는1984년건립되었는데이때신도비도함께세웠다.
※관련일화전설:자암은경학연구는물론이고,특히철학적사색이깊어제자백가의학문
에까지넓고깊은고찰이있었음을그문집에서엿볼수있다.
자암은 음악에도 깊은 소양이 있어, 별곡, 단가 등을 지어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중종때 악
정(樂正)의벼슬에임명된것도그러한때문이었다.전해오는말로는어느날밤자암이궁
중의옥당(玉堂)에서숙식을하면서,밤늦도록낭랑한목소리로독서를하고있었다.갑자기
문 두드리는 목소리가 나더니 중종이 청상(廳上)에 오르시고, 별감(別監)은 주찬(酒饌)을
들고따라왔다.
자암이급히나가뜰아래엎드리니왕이올라오라하시며“이같이달 밝은밤에글읽는소
리가 좋아왔으니 군신의 예를 버리고, 벗으로 대하자 하시며 술잔을 나누었다. 왕이 가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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