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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인조반정 후 사헌부지평에 제수된 이후 동부승지에 올랐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예론
논쟁 과정에서 한 때 경기도 남양(南陽)에 우거하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로 내려가 왕을 호종하
였다. 그 뒤 다시 김장생(金長生)과 같이 서울로 올라갔다.
성리학과 예론에 조예가 있어 많은 논변과『잠야집(潛冶集)』등 여러 저술을 남겼다.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을 추존하는‘원종추숭(元宗追崇)’
을 주장하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를 주창하였다. 말년에
신창에 머물다 세상을 떴으며 염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추배되었다. 묘는 서산 팔봉산에 있었으나
청원 팔봉산에 명당이 있다 하여 청원군 남이면 사동리 등으로 이장하였다. 시제는 음력 10월 중 편한
날로 수시 정한다.
그의 아들 박유연(朴由淵, ?~?)은 은사(隱士)로서 효종이 여러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
고 평상복으로 경연에 참가했던 일로 유명하다.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지평에 추증되었다. 후손
은 염티면 중방리 서원리 신창면 등지에 살고 있다.
[46] 밀양박씨 박지만
| 朴之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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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인물로 밀양박씨(密陽朴氏) 50세(중시조 좌윤공 박을재 14세)이며 초암공파(草庵公派)
아산시 지역, 선장면 신동리 섶골 마을 입향조이다. 선대는 예산 간양리 지역에 거주해왔다. 현재 신
동리에 거주하는 후손 61세(좌윤공 25세) 박홍규(朴弘圭, 75세)씨의 11대조이다.
박지만은 고려 말에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내다가 조선왕조 개창에 반대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
의 충절을 지키고자 예산읍 간양리에 들어와 은거한 초암 박인우(朴麟祐)의 7세손이다. 고조는 어모
장군으로 사맹(司猛, 혹은 상호군)을 지낸 박흥종(朴興鍾, 興宗)이며 증조는 첨정 박창(朴昌)이고 조
부는 장사랑 박검(朴儉)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박유원(朴由元)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충좌위 부사과를 지낸 이영순(李永順)의 딸이다.
그는 지번(之蕃), 지무(之茂), 지만 등 3남1녀 중 셋째아들이며 자는 경재(敬齋)이고 호는 명촌(明
村)이다. 후대 족보에‘사문진사(四門進士)’
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지만이 언제 어떤 사유로 선장 신동리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다. 집안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인조
(1623~49 재위) 때 마을이 밀양박씨로 섶을 이루어 마을 이름이 섶골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선조 말경에 이 마을로 들어 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약 400년 전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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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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