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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갓집에는 훗날 경찰대학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사촌처남을 비롯하여 경찰에 투신한
처남들이 많았다. 결혼 전 대전역에서 근무하던 아내가 극장 구경을 갔는데, 처남의 주
선으로극장에가서처남과인사하고영화상영중에방송으로아내를불러서첫대면을
했다. 슬하에 자녀는 4남매를 두었는데, 큰아들이 스물두 살 무렵 회사 야유회에서 물
놀이중불의의사고로죽어서현재는삼남매다.
그는 1960년대의 4H활동을 비롯하여 15년간 새마을지도자 등을 하면서 마을에 창
고를 건축하였다. 또 지역에서는 초기에 농민들이 회피하였던 통일벼를 처음으로 재배
하는데 성공하여 다수확 상을 세 번이나 수상하기도 하였다. 47세 이후에는 경찰에 있
는처남의동창인,송전철탑공사사업을하는사람을소개받아그밑에서5급공무원의
거의두배에가까운월급을받으며일을했다.
종교단체를 내보내기 전의 신도안은 질서가 굉장히 문란했다고 기억한다. “일례로 쉽
게 얘기하자면, 애 못 낳는 사람들 와서 기도드리면 이게 애를 낳잖아요. 이런 것이 다
그게 문란한 짓이거든. 그런 것이 굉장히 많았어요.” 사실 그의 발언은 반갓집 부녀자들
이사찰로불공드리러가는것을금기시하였던조선시대에도회자되었던이야기이다.그
때의 신도안 모든 종교집단들이 다 그러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다만 일부 신흥종교에서
드러났던현상이었을것이다.
농소리는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에 도읍을 하기 위해 내려와서 처음으로 도착하여 산
신제를 지낸 곳이다. 이성계가 농소리에서 제사를 지낸 설화는 이른바 ‘열두 대실(大室)’
의 지명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예로부터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농소리라는
지명이 붙었다 하고, 농소리에는 예전부터 ‘열두 대실’이라 하여 사자골, 원터, 가자골,
노동, 화재실, 용성말, 진말, 범말, 호염동, 섯밭 등 열두 마을이 있었다. 대실은 신도안이
도읍이 되면 고관대작들이 사는 큰 집을 뜻하며, 언젠가는 이 동네에 큰 마을이 생긴다
하여 이러한 지명이 생긴 것이었다. 동네에 있는 산의 지명이 ‘수당골’인데, 풍수지리설
에 들어맞는 것인지 묘하게도 현재는 그곳에 계룡시에서 물을 공급하는 물탱크가 설치
되었다고 한다. 또한 실제로 계룡시의 개발이 완전히 끝나는 시점이 되면 농소리는 전부
430 계룡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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