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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자암의문학
김구, 자는 대유, 호는 자암, 본관은 광산, 시호는 문의이다. 1488년(성종
19) 9월 28일 한양 동부 연희방 현종로구연건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
성이 착하고 인품이 고왔다. 그는 일찍이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다. 어
려서부터 행실이 독실하고 발분, 정진하여 학문에 임했다. 6세 때 이미“석류
시”를 지을 정도로 성장했다. 8세 때는“오작교시”를 지었고 16세 때는 한성시
에서 1등으로 뽑혔다. 1507년(중종 2) 그의 나이 약관 20세 때 사마시에서 양
장원했다. 이때“시험관이 비를 내려 시권을 보고 말하기를 글은 한퇴지 글이
요. 글씨는 왕희지체라고 칭찬했다.”자암의 나이 26세 때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부정자, 28세 때 이조좌랑, 30세 때 승문원 교리, 31세 때 공조정랑,
홍문응교,홍문관전한,성균사성,장락원정등을역임했다.
1519(중종 14) 자암의 나이 32세 때 홍문관 직제학, 예문관응교, 성균사성
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에 올라 좋은 정치를 시도하였으나 기묘사화로 조광조,
김정 등과 함께 투옥되고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남해에 안치 되었다. 1531년(중
종 26) 그의 나이 44세 때 임피에 양이 되었으며 1533년(중종 28) 그의 나이
46세 때 14년의 유배에서 풀려 나와 고향인 예산 신암 종경리로 돌아와 그 이
듬해 1534년 11월 16일 생을 마쳤다. 향년 47세다. 묘소는 종경리 선영하 자
좌에 안장되었다. 묘소 앞에 신도비를 1984년 4월(갑자)에 세웠다. 특히 자암
은글씨에뛰어나인수체라는독자의서체를창시한서예대가다.
고려말 이래로 서도의 대종으로 군림해온 조맹부의 송설체를 탈피하여 소위
진체라는 왕희지체로 복고를 시도하던 중“인수체”라는 독자의 서체를 창시하
여 조선 고유서체의 시원을 이룬 것이다. 인수체라는 서체명은 자암이 인수방
에 살면서 독자의 서체를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자암은 조
선 초기 4대 서예가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선조때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예산의
덕잠서원,임피의봉암서원등에배향되었다.
저서에“자암집”작품에 이겸인묘비, 자암필첩, 우주영허첩 등이 있다. 특히
자암집에는그의시조5수와“화전별곡”이수록되어있다.
42│묵향의본향에서조선4대명필자암김구를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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